한결웰빙 – 황인숙 생산자

우리 할아버지가 이런 말을 했어요. ‘쬐까 먹고 쬐까 똥 싸라’고.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욕심내지 말라는 뜻이에요. 나가 할 수 있는 최선으로 가장 잘할 수 있는 것을 한 게 이것이요. 그래서 지금은 욕심 안 부리면 먹고살 만은 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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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웬 걸, 사진마다 웃는 모습이 자연스레 환해 쓸 것을 고르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가을빛 담아 반질반질 윤나는 대추처럼 그의 웃음도 참 보기 좋다.

 

《동의보감》 처방 그대로 쌍화차·십전차 만들어

서울에서 기차 타고 3시간 반 가 도착한 여수는 따뜻했다. 한동안 추위에 시달렸는데 봄 같은 날씨가 신기하고 좋았다. 외투를 벗어도 괜찮았다. “나가 살아 보니까 여수만치 좋은 데가 없어요. 물가 낮고 집값 싸고 밭들이 많아서 채소 다 살 수 있고. 날씨 따뜻허여 눈 없지 춥다고 할 때가 바람 불 때니까. 이젠 어디 가라 해도 못 가지요.” 역으로 마중 나온 황인숙 씨가 펼치는 여수 예찬에 절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황인숙 씨는 2005년 서울에서 고향인 여수로 돌아와 한결 웰빙을 열었다. 쌍화차·십전차·총명차·경옥고 등을 만들어 한살림과 두레생협에 내는 가공공장이다. 《동의보감》처방 그대로 물품을 만드는데, 총명차에는 식품이 아닌 약재가 들어가서 그것만 조금 바꿨다.
어떻게 일을 시작했냐고 물으니 “먹고살려고”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그는 1995년 서울에서 한의원을 하던 오빠 황인태 씨 아래로 들어가 쌍화탕·십전대보탕·총명탕·경옥고 만드는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한의원 이름으로 한살림에 물품을 내다가 한의원 이름으로는 물품을 홍보하면 안 된다 해서 ‘마로마을’로 이름을 바꾸어 계속했다. “그때는 한살림이 조그마할 때지. 우리 물건 공급하러 갔다가 매실 소분하는 일 돕고 그랬어. 사람이 없응께.”
그 후 ‘우리몸에좋은것들’이라는 가게를 차렸다. 과일 주스나 천연 향 등을 모아서 파는 소위 ‘웰빙’ 가게였는데, 운영이 잘 되지 않았다. 여기에 개인적 어려움이 겹쳐 고향으로 내려오게 됐다. 힘든 시간이었다. “지금이야 안 그렇지만 여수 다시 와서 처음 한 달은 나가 매일 술이었네. ‘어떻게든 빨리 서울로 다시 가야지’ 하면서. 식구들한테 시달리는 것도 싫고 답답하고.”
그러다 우연찮게 예전에 함께 일하던 한살림 실무자를 만났다. 넌지시 물품을 공급해 볼까 제안했는데 한 번 내보라 해서 다시 일을 시작했다. 제일 어려웠던 건 역시 돈 문제. 중소기업을 지원하는 대출상품이 있었는데, 황인숙 씨한테는 승인이 안 났다. 다행히 은행에 다니던 선배의 남편이 보증을 서 줘서 2천만 원을 빌릴 수 있었다. 그 돈으로 기계도 사고 약재도 사서 2005년 공장을 지어 경옥고를 만들기 시작했고, 이듬해부터 쌍화차를 만들었다. “나가 그 2천만 원 갖고 컸네. 쌍화차 아니었음 뭐 먹고 살았을까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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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궂은 재료 넣으면 효과 못 봐요”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는 쌍화차는 만드는 방법이 간단하다. 작약, 천궁, 황기, 숙지황, 생강, 당귀, 대추, 육계, 감초 등 아홉 가지 약재를 깨끗이 씻어 125℃에서 7시간 반 동안 달이면 끝. “기본을 지키는 게 제일 쉬워. 좋은 약재를 처방에 맞게 넣으면 더 이상 뭘 할 필요가 없거든. 단, 약재에 절대 장난치면 안 돼요. 기본 약재만 좋은 거 쓰면 약효는 저절로 좋게 돼 있어. 얄궂은 재료 넣으면 효과를 볼 수 없어요.”
그래서 다른 곳에서 좀 더 낮은 가격으로 쌍화차를 만들어 달라고 하는 것도 거절했다. “그 값에 맞춰 해달라는 대로 해주면 그거는 약이 아니야. ‘-탕’이라는 이름은 한의원 관할이라 우리가 쓸 수 없어서 쌍화탕을 쌍화차로 바꿨지만 우리 차는 약이에요. 가격에 맞춰 싼 약재로 만들면 그거는 약이 안 되지.”
약재만큼은 좋은 걸 써야 한다고 호되게 배운 것이 지금 황인숙 씨의 가장 든든한 힘이다. “오빠한테 약재에 대해 배울 때, 내가 천궁을 60kg 한 포대 사온 적이 있어요. 그때 오빠가 ‘니는 아직도 약을 볼 줄 모른다’고 하며 사온걸 도로 갖다 주게 했지요.” 처음 일을 시작할 때 인연을 맺은 거래처와 계속 함께하는 것도 좋은 약재를 얻기 위한 노력이다. “돌아가신 분들 빼고는 거의 그대로 지금까지 같이하고 있어요. 돈이 없어서 외상으로 약재를 받아쓸 때도 많았는데, 돈 달라는 소리를 한 번도 안 하는 어르신들이에요. 나도 돈이 생기면 가장 먼저 약재값부터 갚고. 지난달까지만 해도 외상값이 6~7천만 원 됐는데 다 갚았어요.”
욕심 내지 않고 좋은 인연과 함께하는데다가 운도 좋았다. 2009년 신종 인플루엔자A(신종플루)가 유행하면서 면역력을 높이는 데 사람들의 관심이 모아졌다. 마침 쌍화차가 면역력 강화에 효과가 있다고 알려지면서 여름에도 물품이 많이 나갔다. “더 이상 외상값이 없으니까 버틸 수 있겠더라고.” 많이 힘들 때였는데 그때 일이 풀렸다.
10년째 공급가를 올리지 않는 데 비해 가면 갈수록 약재값이 오르는 게 걱정이지만, 국내에서는 돈 주고도 못 구하는 약재도 있다. 현재 한국에 없는 약재에 한해 수입산을 쓰는데, 육계(계피)와 특감(감초)이 그것이다. 그나마 특감은 중국에서도 언제까지 나올지 모른단다. 한중 FTA를 통해 중국에서 더 싼 값에 한약재가 수입될 것으로 예상되지만, 20년 넘은 관계를 믿고 가는 황인숙 씨는 지금처럼 기본을 지켜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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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화차에 들어가는 아홉 가지 약재들. 작약, 천궁, 황기, 숙지황, 생강, 당귀, 대추, 육계, 감초 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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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전차에는 위 아홉 가지 외에 인삼, 백출, 복령 등 세 가지가 더 들어가고 총명차에는 대추, 생강, 당귀, 황기, 백출, 인삼, 복령, 진피, 원지, 산조인, 감초가 들어간다. 십전차는 남녀노소 누구에게나 좋으며, 총명차는 어린이와 청소년을 비롯해 정신노동이 많은 사람들에게 좋다.

 

‘이모’들이 있어 든든해

황인숙 씨는 공장에서 함께 일하는 사람들을 ‘이모’라고 부른다. 2005년부터 지금까지 10년 동안 같이 해온 사람들로, 공장은 옮겨 왔지만 이모들은 변함없다. “처음 화양면에 공장이 있을 때 우리 공장 바로 옆에 살던 동네 사람들이에요. 농사지으면서 이런 일 한 번도 안 해 본 엄마들이 었는데, 진짜 일 잘해요.” 이모들은 여전히 농사도 함께 짓는지라 밭일을 해야 할 때면 새벽에 공장에 왔다가 낮에는 당신 집일을 한다. 이모들이 꼬막이라도 캐러 갈 때는 공장일을 하루 놀린다고 하니 서로서로 돕는 손발이 척척 맞는다.
“처음 공장을 지을 때는 이것밖에 없다는 생각으로 죽기살기로 했어요. 이게 마지막 기회다 생각한 거지.” 하지만 지역 주민들의 텃세는 생각지 못한 것이었다. “사람들이 얼마나 뭐라 그랬다고. 거기는 상수도가 없어서 우물을 파는데, 큰 거 판다고 하도 뭐라 그래서 결국 제일 작은 걸로 팠어요. 시골사람들 그런 게 솔찬혔어요.” 하지만 지금은 누구보다도 잘 지낸다는데, 비결은 바로 인사다. “나는 진짜 인사 하나는 끝내줘. 인사 잘하니까 어른들이 ‘별일 없었능가’ 하며 답을 하는 거예요. 이 사람들이 나빠서가 아니라 낯설어서 그랬던 거거든. 늘 웃고 인사했던 게 제 몫을 했지요.”
날이 더운 여름이 제일 힘들 때고, 추석부터 시작해서 찬바람 불고 일교차가 커지면 물품들이 나가기 시작한다. “우리는 선주문을 받아 생산하기 때문에 재고가 없어요. 재고가 없으니까 버틸 수 있는 거예요. 일주일 전 주문이 들어오면 그때 만들어서 내지요.” 밥도 갓 지은 게 맛있듯이 약도 신선하게 먹는 게 아무래도 좋을 것이다. 역시 힘이 날 때는 소비자를 직접 만나 물품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다. “서울 가을걷이 때 가면 우리 물품 ‘마니아’가 몇 명 있어요. 와서 한 20분은 이야기하다 갈까? 사갈 때도 그리 많이 사가. 그때는 손에 잡히는 대로 듬뿍 줘불지. 진짜 고마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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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결웰빙 식구들. 무슨 일이든 척척 해내는 황인숙 씨의 남동생과 이모 네 명이 있어 걱정 없다.
“이모들, 우리가 벌써 십 년이나 됐네잉.” 함께한 세월만큼 정이 듬뿍 들었다.

 

이웃과 어울려 살다 보니 “지금은 겁나 잘 웃게 됐어요”

돈이 없어 고생한 경험이 많아서일까? 황인숙 씨는 예전엔 돈 많이 벌기를 꿈꿨다고 한다. “‘저 건물을 몇 년 안에 사야지’가 목표였는데, 이제는 그런 생각 안 해요. 나이가 들면서 사람이 유해졌다고 해야 하나? 예전에는 얼굴도 뾰족하고 성질도 외상값 안 갚으면 내가 죽겠고 그랬는데 지금은 겁나 잘 웃게 됐어요. 내가 좀 편해진 거지. 그래서 나는 옛날보다 지금이 더 좋아요.” 그래서인지 이제는 사진을 찍어도 다 웃는 모습뿐이다. 보는 사람까지도 기분 좋아지는 얼굴이다.
마음이 편해진 건 어쩌면 단순하게 산 덕분인지도 모르겠다. “나는 특별히 머리 쓰거나 하지 않고 생각도 단순하게 하고 생활도 단순해요. 남편 퇴근하면 술 한 잔 하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하는데 그게 참 좋아요. 특별한 꿈은 없지만 항상 재밌게 사는 거야.”
이웃과 어울려 사는 것도 마음이 편한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황인숙 씨는 공장을 처음 시작할 때부터 이주 여성, 지역 노인과 아이들 돕는 일을 해 왔다. “그냥 난 처음부터 내가 번 것을 주변에 환원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보고 배웠는가봐. 우리 아버지가 나 어렸을 때부터 학교 장학금도 주고 그랬거든. 다 우리나라 우리 동네인데 같이 살아야제.” 넉넉한 마음이 주변까지 포근하게 한다.
“‘건강한 생각을 하고 건강한 먹거리로 건강하게 살자’가 내가 항상 말하는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기본, 양심으로만 살면 참 좋겠어요. 배운 대로 살면 될 건데 사람들은 자기만 알아요. 물론 나도 말은 이렇게 하지만 행동은 그렇지 못할 때가 있어요. 그래도 어울려서 살아야 한다는 생각은 항상 해야지 싶어요.” 그래서 황인숙 씨는 좀 손해 보며 사는 게 편하다. 당장에는 손해일지 몰라도 나중에 다 나한테 돌아온다는 거다.
눈앞의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뚝심으로 만들어 낸 쌍화차가 많은 사랑을 받는 걸 보면 그 말이 맞는 듯하다. 황인숙 씨는 2남 3녀 5남매 중 맏딸로, 오빠 빼고 부모님과 4남매가 모두 한 동네에 모여 살 만큼 우애가 도탑다. 11월 말 외동아들이 결혼을 하는데, 아들도 엄마를 닮아 벌써부터 모여 살 생각을 한단다. 아이를 가지면 바로 엄마 옆에 와 살겠다는 아들 이야기에 그는 벌써 손주 볼 생각으로 흐뭇하다. 음식은 만드는 사람을 닮는다는데, 가슴속 정이 가득한 황인숙 씨가 만드는 쌍화차는 한겨울 찬 기운을 넉넉히 이기게 할 것만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