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산 자연농회 – 이용호 생산자

더불어 살며 짓는 농사
그것이 삶에 가장 큰 기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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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산자연농회 이용호 생산자

 

이용호 생산자는 예산자연농회를 이끌어 주는 든든한 선배 농사꾼이다. 부모님으로부터 농지를 물려받아 군 제대 후 자연스럽게 예산에 정착해 농부의 삶을 시작했다고 한다. 73세의 나이, 농사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 자연 앞에서의 겸손함이 무르익은 선배를 만나니 환갑을 앞둔 내 마음도 새롭게 달아올랐다.

 

농사 초기부터 한살림을 하신 거예요?
초반엔 양촌지역을 중심으로 관행농사를 지었어요. 부모님이 독실한 신앙생활을 해 온 천주교 집안이어서 가톨릭농민회 활동마저도 자연스럽게 하게 되었습니다. 저도 농약중독사고로 쓰러진 경험이 있었고,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면서 고 박재일 전 회장이 주장하던 ‘생명농업’이 신앙적인 가치와 맞기도 하여 1991년에 한살림과 인연을 맺게 되었지요.

 

고 박재일 회장님과 인연이 오래되셨네요?
1980년대 중반에 저는 충남 이사, 고 박재일 전 회장은 강원 이사로 가톨릭농민회 이사회에서 만났죠. 자주 만나지는 못했지만 이사회에서 만나 함평고구마사건 등 시대적 상황에 대한 의견을 나누고 농민의 자주적인 삶과 생명농업에 대한 정의가 일치하는 사상적인 교류를 나누면서 믿음직한 사람이구나 느꼈죠. 그러다 나중에 쌀가게를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우연히 찾아갈 기회가 있었는데 짐 자전거를 타고 쌀을 배달하는 모습을 감동 깊게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공동체 활동을 하면서 어려운 점도 많으셨지요?
무농약 농사를 시작해 활동을 확장시키면서 카톨릭농민회에서 운영하는 생협매장도 만들었지만 생협운동이 활성화되지 않고 좌절되는 상황에 처했습니다. 그래도 지역에서 함께 하던 동지인 최창구, 구성서, 김수구 등 4명이 함께 1998년 공동체를 꾸리면서 본격적인 한살림 활동과 생명농업으로 이어지게 되었어요.
초기에는 출하에 어려움이 제일이었고, ‘값차이도 얼마 나지도 않는데 뭐 그렇게 힘들게 농사를 짓느냐’며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던 주변 농민들의 인식 전환이 쉽지 않았어요. 하지만 공동체를 만들어서 함께 농사짓고 더불어 살아가는 삶을 산 것은 돌아봐도 잘한 일이에요. 당시에는 어려웠어도 함께 협동하면서 극복해 나갔던 과정이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지요. 하지만 생명농업을 깊이 인식하고 평등한 소득을 이어갈 수 있는 활동이었으면 좋겠는데 점점 경제적인 문제가 우선시 되는 것이 아쉽습니다.

 

젊은 청년들이 농업을 선택한다면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으세요?
귀농이나 귀촌을 위해 명절 때나 가끔 찾아오는 이들이 있어요. 주변의 땅값 상승으로 바로 농지를 구입해서 귀농하는 것이 쉽지 않지요. 내가 살아온 날들을 진심으로 이야기 해주면서 선택을 할 수 있게 돕고 있어요. 농부는 스스로 먹을 것을 지어 먹는 즐거움과 기쁨이 크지요. 그런 것을 말해줍니다.

 

오랜 시간 한살림 해오셨으니 소비자조합원들에게 하고 싶은 말씀도 많으시죠?
넘쳐 나는 수입농산물과 다양한 유기농산물이 있음에도 한살림과 연대감을 가지고 함께 하는 소비자조합원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요. 오랜 연대를 이어가기 위해서는 생산자와 소비자가 서로가 믿음을 쌓을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지요. 제가 공동체 대표로 있을 때 저의 신앙심 때문에 고사상을 차리거나, 제례의식을 하는 것에 반대하여 종종 소비자조합원들과 부딪혔던 기억이 납니다. 지금 생각해보니 아쉽지만 저의 신념을 지키기 위한 행동을 이해해주셨기를 바랍니다.

건강이 허락하는 한 계속 농사를 지을 거라고 말하는 이용호 생산자. 자식들도 자신의 길을 뒤따르기 바란다는 그에게서 농사에 대한 자부심이 묻어난다. 그의 뒤를 따르는 후배 농사꾼의 마음도 든든하다.

 

 

한살림연합 소식지 2015년 2월 (521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사진 김경희 (예산자연농회 생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