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세상 보여준 남편 덕에 한살림합니다
글 이미경 홍보위원
질세라 세력을 뻗치는 머위 군락도 만만치 않다. 어디선가 무논 개구리 소리가 요란한 농촌의 시간표를 읽으며, 충남 아산의 김복순 생산자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순한 미소와 가늘고 예쁜 목소리 주인공은 쉰여덟 나이가 믿기지 않을 정도로 동안이었다. 때마침 같이 맞이해준 남편은 전 한살림생산자연합회장으로 잘 알려진 이호열 생산자.
“저 같은 사람에게 무슨 들을 말이 있다고~ 바깥사람 말고 저를 취재하는 것은 처음 있는 일이네요.”
30년 전 지금의 남편을 만나 뒷바라지만 해왔을 뿐 온전히 자신을 드러내 본 자리는 없었던 김복순 생산자.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하던 20대에 부모님 소개로 이호열님을 만났다고 한다. 세 번 만나고 결혼하자는 남자, 편찮으신 부모님과 형, 결코 평범해 보이지 않는 분위기의 남자를 처음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대답을 들은 남자는 백일동안 백 통의 두루마리 편지를 보냈다. 흔히 있을 법한 연애편지가 아니라 앞으로 세상에서 펼쳐나갈 꿈을 담은, 하늘과 반려자에게 바치는 기도이자 다짐이었다. “그 때는 나이도 어리고 판단력도 흐린 때라 하느님이 주신 인연으로 여겼지요.” 어쨌든 추진력과 포용력이 만난 천생연분임에 틀림없다.
묵묵히 뒷받침하며 걸어온 30년
농촌에서 살아본 적 없는 그녀에게 모든 것은 녹록지 않았다. 남편은 집안일보다는 바깥일에 시간을 쏟았다. 청년 시절 농민운동부터 시작해 푸른들영농조합을 설립하고 키워낸 남편은 단순한 농사꾼은 아니었다. 무슨 일이든 하면 크게 제대로 해내는 편이라 결과가 보일 때까지 그녀가 감내해야 할 일은 많았다. 88년 당시, 한살림생산자협의회 총무를 맡은 이호열 님은 생산자를 찾아 전국을 누비다 과로로 위기를 맞았다. 남편 대신 농사일과 집안일을 책임져야 했던 김복순 생산자 역시 일속에 묻혀 위장염과 심리적인 허탈감에 앓는 날이 많았다. 농사일 역시 쉽지 않았다. 한살림 최초로 도전한 유기농 오이 농사는 2년 연속 실패를 겪었다. 고된 노동에도 쌀독은 비어갔다. 보다 못한 소비자조합원이 “어차피 한살림에 없던 품목이니 약 한번 치라”고 말하거나 조용히 쌀 포대를 두고 갈 정도였다. 그래도 이쑤시개로 진딧물을 잡아가며 버텼다. 한살림에 처음으로 세척무를 공급했을 때에도, 지금 20년째 하고 있는 토마토 농사를 시작할 때에도 쉬운 일은 없었다.
가는 길이 분명 잘못된 것은 아닌데 힘들고 공감대를 얻기도 어렵고 그 사이에서 느끼는 괴리감이 가장 힘들었어요.
누구한테 물어보지도 털어놓지도 못했다. 아직은 때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남편의 일이 누군가는 해야 할 필요한 일이라 여기며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아산지역이 한살림의 중추적인 생산지로 안착하고 그 안에서 ‘여성생산자모임’, ‘푸른들영농조합’ 등이 자리 잡기까지 그 뒤에는 묵묵히 뒷받침을 한 김복순님이 있었다. 행사 때마다 설거지를 도맡아 했다. “남편이 앞장서 일하는데 저까지 드러낼 일은 없잖아요. 대표로 있을 시절엔 콩나물 공장에서 품도 못 팔게 할 정도로 남편 역시 철저한 사람이었어요.”
그래도 남편 덕에 넓은 세상을 보았어요
그런 세월 때문인지 처음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자리인데도 좀처럼 시원시원한 맛이 없다. 남편이 없어 결혼반지를 처분해 아이 출산비를 보탰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때 심정을 물어도 다 잊어버려서 기억이 안난단다. 다른 삶을 꿈꾸어 본 적은 없느냐고 물었지만, “너무 바빠서였는지 잘 몰라서 행복했던 건지, 생각해본 적 없네요.” 대신 미소 지으며 이렇게 대답한다.
내 것 내 욕심 먼저 생각하는 잔머리 생기면 큰 일 못해요. 남편은 지금까지 결혼 전 다짐한 편지 내용처럼 살고 있어요. 저도 이 사람 만나지 않았으면 내 것 벌어 나 먹고살 줄밖에 몰랐을 거예요. 저에게는 남편이 넓은 세상 보게 해준 사람이고 한살림하게 한 사람이죠.
평생 일을 놓지 못할 것 같다는 김복순ㆍ이호열 부부는 경제와 생활 공동체, 복지 문화가 어우러진 한국의 키부츠(qibbutz)를 꿈꾸며 시작한 ‘사회적협동조합 아산제터먹이’ 마을 만들기에 여전히 바쁜 나날이다. 작지만 강단있는 김복순 생산자에게서 지금의 한살림이있기까지의 힘을 느낀다. 큰 세상 보여준 남편 덕에 한살림합니다.
한살림서울 소식지 <한살림사람들> 2015년 5월에 실린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