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창 산하늘공동체 – 정쌍은·임혜숙 생산자

껍질째 먹을 수 있어 그럴까요,
족제비·두더지도 포도밭에 놀러옵니다

 

[중앙일보] 입력 2012.10.12 04:04

 

 

[이영미의 위대한 식재료] 거창 유기농포도

‘내 고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시절’, 이육사의 유명한 시 ‘청포도’ 때문일까. 사람들은 여름이 되자마자 포도를 기다린다. 하지만 나는, 이 시의 ‘칠월’이 음력 7월이라 확신한다. 양력 7월은 포도 알이 달려 있을 뿐 ‘익어가는 시절’이라 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포도는 여름 과일로 선입견이 형성되어 있지만, 사실 여름의 끄트머리인 8월 말에 캠벨포도로 시작해 10월 중순 머루포도까지 이어지니, 초가을 과일이라 하는 편이 옳다. 생각해 보라. 해마다 추석 때 가장 맛있는 과일은 포도이지 않던가. 성장촉진제로 허우대만 멀쩡하게 키운 사과와 배는 그저 제수용일 뿐이고, 정작 식구끼리 먹는 과일은 포도다. 전국의 포도 축제들도 대체로 8월 말과 9월 초에 몰려 있다. 그때부터 진짜 포도 철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1 잘 익은 거봉포도를 말벌들이 신나게 포식 중이다. 사람 기척에도 개의치 않았다. 말벌이 봉지를 뚫고 파먹어서, 이 한 송이는 봉지 벗겨놓고 그냥 말벌에게 보시했다. 2 갓 따온 거봉포도.잘 익어, 색깔이 마치 캠벨포도만큼 까맣다.

 

다른 지역보다 늦은 9월 중하순에 포도 축제를 여는 동네가 있다. 경남 거창군 웅양면이 그곳이다. 웅양은 일교차가 커서 사과와 포도 등 과일 농사를 주로 하는 곳인데, 특히 웅양의 송산마을은 포도농가 전부가 무농약으로만 재배한다. 웅양 송산마을이 무농약 지대가 된 것은 경남 유일의 유기농 포도 농가인 정쌍은포도원 덕분이다. 주인인 정쌍은과 임혜숙은 1957년생 동갑내기 캠퍼스 커플로, 대학졸업 하자마자 귀농을 선택한 희한한 부부다. 포도 농사는 20년 전부터였다. 처음부터 저농약으로 포도를 키워 몇 년 후 무농약으로, 또 유기농으로 업그레이드했다. 유기농으로 포도를 재배한 지도 벌써 10년째다.

친환경 농업을 선택한 사람들이 다 겪은 일이지만, 이들도 극성스러운 병충해에 참 많이 망해 먹었다. 여러 통로로 친환경 재배 노하우를 배우며 차츰 극복해 갔지만, 그동안 동네 사람들이 ‘언제쯤 망할까’ 하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쳐다보는 시선을 견뎌야 했다.

 

이들이 가장 심혈을 기울인 것은 완전개폐식 비닐하우스였다. 포도의 비닐하우스 재배는 남들보다 빠른 시기에 출하를 하기 위해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이들은 오로지 비를 가리기 위해서다. 비를 맞으면 바이러스성 전염병인 노균병이 창궐하게 되는데, 비닐하우스로 비를 맞히지 않아 병을 예방하는 것이다. 대신 평상시에는 완전히 열어 노지와 동일한 조건을 만들어 준다. 밭 사이로는 거위들이 떼 지어 몰려다닌다. 초봄부터 5월까지 잡초를 제거해 주는 놈들이다. 풀이 세어지는 여름에는 일일이 기계로 깎아주며 제초제는 쓰지 않는다. 임혜숙씨는 거위를 보며 ‘겨울에 매일 밥 챙겨주는 게 일’이라고 툴툴거렸지만, 그래도 족제비의 습격에도 씩씩하게 버텨주는 거위들이 대견스럽다는 표정이다.

 

이들 밭 주위에는 거위와 족제비만 있는 것이 아니다. 새와 벌레에 뱀·두더지까지 함께 산다. 이들 말에 의하면 친환경 농업의 핵심은 단지 농약과 화학비료를 쓰지 않는 문제가 아니라 자연의 순환을 해치지 않는 생태주의적 사고방식, 즉 철학의 문제라는 것이다. 온갖 생물들과 더불어 살며 먹이피라미드를 살려 놓는 것, 그것이야말로 농약과 화학비료에 의존하지 않는 길이라고 믿고 있다.

그러니 인위적인 호르몬제인 성장촉진제도 쓰지 않는다. 그걸 쓰면 포도 알이 고르게 굵어지고 포도송이가 빡빡하게 먹음직스러워진다는 것을 안다. 포도 씨가 부실해질 수 있지만, 그걸 씨 없는 포도라 선전하면 더 잘 팔리기도 한다는 것도 안다. 뭐, 성장촉진제가 유해한지 여부가 아직도 완전히 판명되지 않았지만, 하여튼 그와 무관하게 안 쓴단다. 왜냐고? 정쌍은씨의 답은 간명했다. “그런 게 싫어요.”

그래서 그들은 나무를 빨리 키울 수도 없고, 많이 수확할 수도 없다. 남들은 거봉 묘목 심은 지 2년이면 본격 생산이 되는데, 이들은 4년이나 걸렸다. 거름도 몇 년 전까지는 톱밥과 깻묵 등을 사다가 일일이 만들어서 썼다(그의 집 ‘푸세식’ 화장실 벽면에는 “똥통에는 똥오줌만. 휴지는 휴지통에. 포도에게 필요한 양식입니다”라고 쓰여 있다). 이제는 너무 힘에 부쳐 돈이 들더라도 그냥 유기농 거름을 사다가 쓰고 있다.

 

어쨌든 이들은 굶어죽지 않고 살아남았다. 다행히 경남 지역의 생협에 납품할 수 있게 되면서였다. 이들이 살아남는 것을 보자 이웃들이 변했고, 결국 10년 전부터는 송산마을 전체가 무농약 지대가 되었다. 관행농 포도를 밭떼기로 팔던 것에 비해 생협에 납품해서 소득이 1.5배로 늘어나니 이웃들도 선택 안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나의 궁금증은 ‘맛’이었다. 정말 관행농 포도와 맛이 다를까.

정쌍은씨가 내놓은 포도를 보고 깜짝 놀랐다. 알의 크기로 보면 분명 거봉인데, 색깔은 캠벨 같은 검은 진보라색이다. 이 포도가 진짜 거봉? 거봉은 캠벨과 달리 신맛이 없으니 열매에 붉은 빛이 돌며 맛이 들기 시작하면 바로 수확하는 경우가 많단다. 그런데 더 충분히 익히면 색이 검어지고 맛도 더 좋아진다. 그런데도 미리 수확하는 것은 과육이 단단해 유통이 편할 뿐 아니라 무엇보다 수확량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나무 하나가 완숙시킬 수 있는 열매의 양은 정해져 있어 미리 따면 더 많은 양을 수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까만 거봉을 입에 넣고 씹었다. 와! 이런 거봉 맛은 처음이다. 머루포도 못잖게 강한 단맛에 향기도 좋았다. 심지어 껍질까지 맛있다. 옆에 놓인 캠벨도 먹어 보았다. 거봉만큼 맛 차이가 큰 건 아니나 이것 역시 완숙한 단맛과 포도 향이 강하다. 무엇보다 껍질 속의 맛있는 과즙을 함께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좋은지. 이 정도면 값이 비싸도 택배로 사먹겠다고 했더니만, 임혜숙씨는 택배로는 친정엄마한테도 못 보낸단다. 잘 뭉그러지는 완숙 과일이어서 택배는 사절이다. 자신들이 납품하는 생협을 이용하든가 직접 오든가, 둘 중의 하나란다. 못 말리는 배짱이다.

 

이들은 와인도 생산하고 있었다. 1년에 포도 2.5t으로 2000병을 생산하니 세상에서 가장 작은 와이너리일 것이라며 웃는다. 정쌍은와인은 색다르다. 살균제인 아황산염, 포도 찌꺼기를 가라앉히는 화학적 침전제, 변질을 막는 산화방지제 등을 쓰지 않아 국내 최초로 유기가공 인증을 받은 와인이다. 못 말리는 이들 부부는 인공적으로 배양된 효모가 아닌, 그냥 포도 껍질에 붙은 자연 상태의 효모로만 발효하는 원초적 방법을 고집한다. 배양 효모를 쓰면 해마다 균일한 맛의 와인이 생산되지만, 자연 효모를 쓰면 마치 집에서 담근 김치처럼 해마다 맛이 조금씩 달라진다. 이런 무모한 짓을! 그런데 한 술 더 떠서 병에 넣은 후 열처리로 효모를 죽이는 공정도 하지 않는단다. 그저 3년 숙성한 와인을 병에 넣는 것으로 끝을 낸다. 그래서 (마치 생맥주나 생막걸리처럼) 효모가 살아 있는 생 와인이다. 냉장보관할 것을 권한다.

이들은 발효를 더 진행시켜 포도식초도 만든다. 식초에 포도즙을 섞은 포도식초가 아니라 진짜 포도를 발표시킨 식초 말이다. 시판은 하지 않지만, 지인들에게 인기가 좋아 지난해 것은 벌써 동이 났다.

와인을 시음해 보니 캠벨 특유의 향이 있고 바디감과 묵직한 향은 부족했다. 하지만 달지 않고 드라이해 건강하고 소박한 와인을 즐기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좋은 와인이다 싶다. 연갈색의 포도식초는 향이 아주 뛰어났다. 깊은 와인 향이 흘러 약간의 가미를 하면 샐러드용 발사믹식초를 대신할 만했다.

 

취재를 위해 자료를 모으다 인터넷카페에서 이들 부부의 포르투갈 여행 사진첩을 구경할 수 있었다. 흥미롭게도 사진의 태반이 관광지가 아니라 채소밭, 포도밭, 농기구, 와인 병, 야채 모종 등을 찍은 것이다. 식구들 선물도 안 챙기고, 강력본드 섞지 않은 질 좋은 코르크 마개만 잔뜩 사들고 왔단다. 못 말리는 이 부부의 맛있는 포도를 먹기 위해서라도 내년에는 가을 휴가를 준비해야겠다.

 
 

글=이영미 대중문화평론가

사진=신동연 선임기자

 

* 기사원문보기

http://news.joins.com/article/9567815#no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