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아래공동체 – 김순영·권오수 생산자

간이 잘 맞습니다

 

 

유기농사를 지은 지 10년 만에 땅이 살아나더니 개구리, 뱀, 도롱뇽이 다 보이게 됐다. 사람도 땅과 같아서, 매일 눈물로 밤을 지새우던 아내는 농사지은 지 18년 만에 이곳이 너무 좋단다. 그러니 지금은 너무너무 싫은 남편의 수염도 숀 코네리보다 멋있게 느껴질 때가 오지 않을까? 김순영·권오수 부부를 만나고 돌아오면서 ‘시간의 힘’을 믿게 됐다. 포도에 맛을 들이고, 마음의 결을 바꾸고, 차의 간을 맞추는 그 대단한 힘을.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이젠 서울에서 못살 것 같아요”

김순영 씨와 만날 약속을 정하면서, 염치없게도 점심을 얻어먹고 싶다고 했다. 꼭 나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농부는 어떤 밥상을 차리는지 알고 싶은 직업적 호기심 때문이었다. 먼저 머위, 원추리, 무말랭이 등으로 담근 장아찌가 한 접시에 담겨 나왔다. 된장으로 무친 잔대나물과 간장으로 무친 취나물이 하나씩. 데친 두릅도 있다. 돈나물, 참나물, 부추, 상추, 미나리, 민들레 등 마당에 다 있는 것들로 만든 샐러드가 밥상의 중심. 잡곡밥과 된장국에 식사를 시작하자, 건강한 재료 덕분만이 아닌 감칠맛이 느껴진다. 심상치 않다.

“내가 요리를 참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요리학원을 차리고 싶었지요.” 샐러드 채소는 손으로 뜯어야 하고, 나물 무칠 때 기름을 조금 넣으면 독소를 없앨 수 있다며 담담하게 말하는 김순영 씨. 그러나 꿈을 접고 귀농하기까지는 마음 고생이 심했다.

 
 


 

나물로만 이렇게 다양한 반찬을 만들 수 있다. 더 신기한 건, 전부 다 맛있다는 사실.(위) 차는 눈으로 빛깔을 보고, 코로 향기를 맡으며, 입으로 맛을 본다. 차를 마시면 술이 빨리 깬다며, 김순영 씨가 애주가인 권오수 씨를 슬쩍 보았다.(아래)

 
 

김순영 씨와 권오수 씨는 권오수 씨 고모의 중매로 각각 23살, 29살 되던 해 결혼했다. “네 번 만나고 결혼했어요. 그때는 여자들이 높은 구두를 신을 때인데, 남편이 나보다 키가 작은 거 같아 안 만나려고 했어요. 그런데 어찌나 쫓아 다니던지.” 권오수 씨가 52살에 회사에서 퇴직하면서, 상황이 역전됐다. 미련 없이 짐을 싼 그가 고향인 경북 상주로 귀농한 것이다. “신혼여행을 갔는데 남편이 자기는 50살에 무조건 귀농할 거라고 말하는 거예요. 그때는 설마 그럴까, 거짓말이겠지 하고 그냥 살았지요. 그런데 정말 가버렸어요.”
권오수 씨에게 왜 귀농할 생각을 했느냐고 물었더니, 별말없이 멋쩍은 듯 고개를 돌린다. 꽃 기르고 동물 키우고 자연에 있기를 좋아하는 그는, 도시에 살면서도 늘 고향이 그리운 것을 차마 말하지 못했나 보다. 모판 실은 무거운 지게를 지고 산턱에 있는 논을 오르내리면서도 “농사가 항상 재밌다”고 에둘러 표현했을 뿐.
김순영 씨는 권오수 씨가 먼저 귀농하고 1년 후에 따라갔다. “나는 태어나서부터 도시에서만 살아서, 시골에서는 절대 못 산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접고 오기까지 시간이 걸렸지요.” 이유는 단 하나, 그를 혼자 둘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부부는 농지 옆 컨테이너에서 살림을 시작해, 거기서 5년을 더 살았다. 지금도 이 컨테이너는 깃든 추억이 많아 차마 버리지 못하고 집 옆에 모셔두었다. “그때는 어떻게 사나 싶었는데, 다 살게 되네요. 또.”
귀농이 뭐 어렵나, 그냥 농사지으면 되지 않나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하지만 정작 귀농 성공률은 20%도 안 된다고 한다. 마을에 적응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나는 귀농하려는 사람에게 ‘집부터 짓지 마라, 승용차 몰지 마라, 마을 사람과 어울려라’라고 말해요. 집이 중요한 게 아니고 농사지을 땅을 가질 생각부터 해야지, 안 그러면 금방 떠날 사람이라고 생각한다고. 우리가 들어왔을 때도 마을 사람들은 1년을 못 살 거라고 말했어요.” 권오수 씨의 말이다.
“처음 2~3년은 계속 울었어요. 적응이 안 돼서. 그런데 한 8년 지나니까 적응이 되고, 18년째 되는 지금은 너무 좋아요. 얼마 전 서울에 결혼식이 있어서 갔는데 눈도 따갑고머리도 아프고. 난 이제 서울에는 못 살 것 같아요.”
 
 
소출 적고 이웃에게 욕먹어도 친환경농사 고집하는 이유

“처음부터 친환경농사 지으러 왔죠. 그런데 사람들이 미쳤다고 그러더라고요. 당시만 해도 친환경농사라는 게 진짜 형편 없었거든요.” 농사를 전혀 모르던 부부는 모든 것을 새로 배워야 했다. 그래서 2년 동안 관행농사를 지으며 가톨릭농민회를 드나들었다. 덕분에 친환경농사로 빨리 전환할 수 있었고, 3년째부터 한살림 햇살아래공동체 생산자가 됐다.
어려움은 곳곳에 있었다. 농약을 안 치니까 포도나무가 잘 망가졌고, 퇴비나 미생물액은 일반 농약에 비해 더 비쌌다. 마을 이웃들은 제초제는 농약과 달리 해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지금도 지나갈 때마다 “아유, 풀을 왜 이렇게 키워? 내가 제초제 좀 쳐줄까?” 한다. 게다가 관행농사보다 소출은 1/3 적다.
오해도 많이 받았다. “밭에 미생물액, EM발효액, 아미노산 같은 걸 주는데 이것들은 햇볕이 뜨거울 때 주면 안 돼서 새벽이나 해진 후에 친다고. 그러면 사람들이 ‘저것들 약 안 친다면서 밤에 몰래 친다’고 그랬어요.”
이야기를 듣다 보니 굳이 어렵고 힘들게 농사지을 필요가 있었나 싶었다. 무엇이 귀농 초년생의 마음을 친환경농사에 붙들어 놓았는지 궁금했다. “신념 가지고 하는 거죠. ‘하느님을 배반하면 안 된다, 농약 안 쓴다’라는 신념이 없었으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라는 권오수 씨는 오히려 신자가 아닌 사람들이 친환경농사를 짓는 것이 정말 대단하다고 말한다. 욕심 부리지 않고 ‘주시는 대로 먹는다’는 부부의 모습이, 오늘날 생명보다 돈을 앞세우면서 신자를 참칭하는 일부 사람들과는 크게 달랐다.

“소비자들도 우리를 이해해줘야 하지만 우리도 절대로 소비자들을 기만하면 안 되거든요.” 김순영 씨가 나긋하면서도 단호하게 덧붙였다. 소비자는 생산자의 생계를 책임지고 생산자는 소비자의 밥상을 책임진다는 약속은, 이렇게 지켜진다.
 
 

요즘은 포도송이 옆에 자그맣게 달린 예비 송이인 ‘육손’ 따기가 한창이다. 가지를 살며시 잡고 손톱 끝으로 똑!

 
 
포도 한 송이에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부부는 포도농사와 벼농사를 짓는다. 포도는 5월 말쯤 꽃이 피고, 바람에 의해 수정돼 꽃이 떨어지면 알맹이가 맺힌다. 상주 포도 수확은 9월 3일경. 영천-김천-상주 순서로 일러도 8월 말부터 나기에 여름과일이라고 부르기엔 무리가 있다. 최근엔 수입산 포도가 너무 많아 포도의 제철을 모를 지경. 기후변화에 따라 앞으로 포도농사가 강원도 쪽으로 올라갈 듯하다.
요즘은 ‘육손’ 따기가 한창이다. 포도송이 옆에 자그마한 예비 송이가 달린 것을 육손이라 하는데, 이걸 따야 진짜 송이가 잘 자란다. 육손과 비슷한 어깨 송이와 곁순 역시 함께 따서 가지를 키운다. 알맹이가 맺히면 솎아주는 일도 해야 한다. 한 송이에 120알 정도가 달리도록 모양을 만드는 것이다. “포도 한 송이에 손이 얼마나 많이 가는지 몰라요.” 김순영 씨가 일손을 쉬지 않으며 말한다.

가지치기도 여간 어렵지 않았는데, 권오수 씨가 좋은 방법을 생각해 내 이제는 가을부터 봄까지 세 번에 나눠서 한다. 수확이 끝난 후 묵은 가지를 잘라주고, 설 쇠고 보름이 지난 때에 가전지를 한 후 봄에 접어들면 한 번 더 하는것. “이렇게 하면 혼자서도 할 수 있거든. 18년쯤 되니까 요령을 조금 터득한 거예요.”
포도밭 아래에는 풀 자라지 말라고 검은 천을 씌웠는데, 장마 지나면 풀이 더 안 자라므로 천은 거둔다. 위에는 산성비 맞지 말라고 비가림막을 쳤는데, 역시 수확하면 다 거두어 땅이 비를 맞고 회복하도록 한다. 낮에는 덥고 밤에는 25도 이하로 일교차가 커야 당도가 좋은 까닭에 열대야는 좋지 않다. 물은 임의로 줄 수 있기 때문에 가뭄보다 태풍과 장마에 늘 마음을 졸인다.
벼농사는 처음에는 3만5천 ㎡(약 5천 평, 70마지기) 정도 짓다가, 농사일이 힘에 부치면서 지금은 5천 ㎡ 정도만 짓는다. 소금물에 담가놨던 볍씨를 65도에서 열탕소독한 후 싹을 틔운다. 그리고 모판에 모를 키우다가 6월 말에 논으로 옮겨 심는다. 논에서 모를 갉아먹는 물바구미가 날씨가 더우면 오히려 활동을 잘 못하기 때문으로, “다들 늦다고 뭐라 하는데, 수확할 때는 똑같더라”며 김순영 씨가 말한다. 남들은 벼농사가 쉽다고 하지만, 김순영 씨는 포도농사보다 벼농사가 더 어려운 것 같다. 그중에서도 태풍이나 큰 비에 쓰러진 벼를 다시 세우는 것이 제일 힘들다. 마을사람들이 도와주지 않았다면 못했을 것이다.

 
 

모를 키우고 남은 볍씨를 마당에 말리는 중. 말 그대로 발아현미다.

 
 
관행농사에 100명 간다면 유기농사에는 1명 오는 현실

부부는 농사일에만 파묻히지 않으려고 다도를 배웠다. “농사짓는 사람이 저러고 다니니까 농사도 옳게 안 된다고 말 많이 들었죠. 안 그래도 친환경 한다 하면 농사 못 짓는다는 소리 많이 듣거든요. 여기 사투리로 ‘반거치’라고.”
귀농 후 부부가 하루 종일 같이 있으면서, 자꾸 다투게 됐다. 김순영 씨는 권오수 씨의 철두철미한 성격에 화가 났고, 권오수 씨는 김순영 씨가 깜빡깜빡 기억을 못하는 게 문제였다. 그러던 중 알게 된 다도는 아마도 둘 사이에 완충 역할을 하는 듯싶다. 부부는 틈틈이 마주앉아 차를 마시며, 일상과 함께 고요를 나눈다.

 
 

 

고된 농사일로 입가가 자꾸 부르트자, 권오수 씨는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김순영 씨는 보기 싫다고 손사래를 치지만, 며느리 둘은 멋있다고만 하더란다.(위) 포도는 처음부터 송아리를 맺어 나온다. 꽃이 필 때면 마을 어귀에서부터 향기가 대단하다.(아래)

 
 
역시 제일 걱정은 뒤를 받아줄 사람이 없는 것. 15년 동안 유기농사로 다 살려놓은 땅을 아무한테나 맡길 수가 없다. “땅을 놀리면 놀렸지 농약 쳐서 하루아침에 망치게 할 수는 없어요. 유기농에 뜻이 있는 사람이 와야 하는데 사람이 없네.” 귀농인구가 늘어난다고 하지만 관행농부가 느는 것이지 유기농부는 아니라는 권오수 씨는 관행농사에 100명이 간다고 하면 유기농사에는 1명 정도 온다고 한다.
“도시 사는 동생들이 오면 햇볕에 두 시간만 일해도 어지럽고 토할 것 같아 못하겠다고 해요. 처음엔 다 그래요. 나도 그랬거든요. 그런데 지금은 완전히 정착했잖아요?”라고 말하는 김순영 씨는 사람들이 유기농사를 너무 꺼리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권오수 씨는 더 많은 사람들이 농사를 경험했으면 한다. 안 쓰는 근육 움직여 운동도 되고, 내가 기른 농산물을 먹으니까 건강에도 좋다. 은퇴가 없는 일이라 노후도 대비하고, 귀농을 위한 예비지식도 기를 수 있다. 땅이 없으면 어떤가? 마을에는 이웃을 사귀어서 주말마다 내려와 농사일도 돕고 놀다 가는 도시 사람이 있다. “우리가 도시에 사는건 생계 때문인 게 크잖아요? 농촌에서 생계를 해결할 수 있다면 공기 나쁘고 복잡한 도시에서 살 필요가 없지. 그러려면 농사지을 줄 알아야 하고.”
하지만 농촌에는 귀농인만이 아니라 다양한 사람들이 필요하다며 말을 잇는다. “여기 화동 면소재지에 80살 된 약사 한 분이 있어요. 이 분이 돌아가시면 약국이 없는 거예요. 농부만 있다고 농촌이 살아나는 게 아니지. 장사하는 사람도 있어야 하고 식당도 있어야 해. 한창 바쁠 땐 밥해주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니까.”
부부는 자신들처럼 많은 사람들이 농촌으로 오길 바라면서 찻잔을 들었다. 알맞게 잘 끓여진 차를 두고 “간이 맞다”고 한단다. 끓는 물을 70~80도로 한 김 식혀서 찻잎을 정성스레 우려낸 덕분이다. 삶의 전환기에서 농사를 선택한 권오수 씨의 강단과 남편과 함께하기로 결정한 김순영씨의 마음도 시간이 흐르면서 삶에 잘 우러났다. “간이 잘 맞습니다.”라고 말을 나누었다.

 
 

살림이야기 제25호 (2014년 6월호) 땅땅거리며 살다

글 이선미 편집부 / 사진 이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