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입과 수급에 대한 원칙 – 한살림 정책해설 연재

한생연 소식지

창간준비 4호

4면

한살림 정책해설 연재 04

 

완고하지만

조합원의 요구에 귀 기울이고

지속가능한 농업을 우선 순위에 둔다

 

수입과 수급에 대한 원칙

 

수입물품과 수급물품에 대한 한살림의 원칙은 다른 생협이나 친환경물품판매점보다 훨씬 완고하다. 1989년 한살림이 처음으로 공급한 빵은 수입밀로 만든 것이었다. 우리밀이 없던 때라 논쟁 끝에 수입밀로 만든 식빵과 카스테라를 공급했다. 국산잡곡을 섞고 화학첨가물은 배제했다지만 수입밀이 주원료임에는 분명했다. 조합원의 요구에 어찌할 수 없는 선택이었다. 한살림은 이일을 계기로 우리밀을 찾아나섰고, 경남 고성에서 계약재배하게 된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우리밀살리기운동을 벌여나간다. 마침내 한살림은 1993년 가을에 우리밀 빵을 공급할 수 있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라면 원칙적으로 수입은 반대

한살림은 1998년 물품정책, 물품 개발·취급기준에 ‘기본적으로 국산이면서 유기농, 무농약재배 농산물을 원료로 사용하여 만든 가공품을 개발, 취급하고…’라고 명시했다. 당연히 한살림운동에 수입농산물이 끼어들 여지는 없었다. 하지만 수입물품의 취급여부는 때때로 논쟁거리가 되었다. 최초의 논쟁은 수입산 명태와 이를 원료로 하는 물품의 취급여부였다. 국내산 명태를 더 이상 구하기 어려워지자 한살림은 1년간 물품공급을 중단한다. 차례상에 빠질 수 없는 물품이 계속 공급 중단되자 명태만이라도 제한적으로 수입산을 허용하자는 의견이 거세졌다. 오랜 시간 토론회, 조합원 설문조사 등을 거쳐 2004년 4월부터 수입산 명태만 제한적으로 허용한다. 2008년에는 설탕을 비롯한 공정무역물품 취급, 2009년에는 수급이 어려운 국내산 버터를 대체해서 수입산버터를 사용하는 것이 다시 논란이 되었다. 두 가지 문제 모두 한살림이 지향하는 물품취급 원칙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조합원들의 동의를 받지 못했다. 하지만 계속된 취급요청에 2016년부터는 공정무역 설탕 취급을 원하는 회원생협은 별도로 취급하게 되었다.

한살림의 농업정책과 물품정책, 물품취급기준은 ‘지속가능한 우리농업살리기’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한살림은 각국·각지의 기후·풍토에 맞는 농업, 유기농업·지역복합형 친환경순환농업, 식량자급률 향상을 원칙으로 제시한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지역농산물과 우리농산물을 우선해서 취급하는 것이 한살림의 지향이다. 이를 통해 식량의 자급과 자치, 자립을 만들어내고 나아가 생태순환적인 지역농업을 확장하자는 것이다.

 

수급, 수요와 공급 조화를 위한 완충지대

수급(需給)은 사전적인 의미로는 ‘수요와 공급’을 아우르는 말이다. 약속한대로 공급하는 것도 수급이고, 부족한 것을 찾아내는 것도 수급이다. 하지만 한살림에서 말하는 수급은 계획이나 약정이 없었던 물품의 임시공급을 의미한다. 한살림은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약정이라는 절차를 통해 누가, 무엇을, 얼마나, 어떻게 생산하고 소비할지를 약속하는 곳이다. 그래서 수급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들은 약속되지 않은 것, 즉 계획되지 않은 것을 제공한다는 측면에서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계획생산에 가장 중요한 가치를 두기 때문이다.

그런데 계획대로 생산하고 공급하는 일이 말처럼 쉽지 않다. 계획대로 생산이 되지도 않을뿐더러 계획대로 소비되는 일도 흔치않다. 한살림 초기에는 남으면 남는대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물품사업을 진행했다. 부족한 것을 채우는 의미의 수급은 아주 제한적인 범위에서만 작동되었다. 하지만 물품사업의 규모가 커지기 시작한 2000년대부터 계획생산-계획소비의 사업기조가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한다. 이때부터 수급이라는 말이 보편적으로 사용된다. 조합원이 필요로 하는 물품은 연중 공급되어야 하는, 가능한 모든 물품은 중단 없이 공급되어야 하는 물품사업이 시작된다는 의미다. 물론 이런 사업기조 속에서도 필요물량의 기본적인 생산계획은 수립되지만 공급된 품목과 공급량의 상당 부분이 수급으로 채워진다. 필요 물품을 농민에게 직접 수급하기도 하지만 점차 중간업체를 통해 물품을 조달하기도 한다. 계획생산과 소비가 물품사업의 탄력성, 유연성을 떨어뜨린다는 생각도 커져갔다.

2011년에 설립된 한살림연합은 이러한 물품사업방식을 규제하는 ‘한살림 물품(농산물) 수급지침’을 만든다. ①한살림 생산자를 중심으로 생산계획을 수립하고 ②문제가 발생하면 추가로 생산계획을 세우고 ③반드시 생산현장을 방문·점검해서 수급하고 ④중간수집업체를 통해 물품(농산물)은 수급할 수 없다고 명문화한다. 물품사업의 기조를 계획생산으로 잡고 아주 제한된 범위에서만 수급을 허용한 것이다.

 

무분별한 수입물품의 취급이나 수급물품의 공급은 한살림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식량자급, 계획생산, 책임소비-를 거스를 수 있음이 분명하다. 어떻게 물품사업을 벌여야 우리농업의 지속가능성과 안정성을 높일 수 있는지 끊임없이 고민해야 한다. 한살림이 존재하는 가치는 관계에 있음을 명확히 인지하며 수급의 필요성은 인정하되 허용범위를 규정해야 한다.

 

배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