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솔뫼공동체 – 박명의 생산자

토종종자 씨받이 보석상

 

 

어느 곳은 눈이 내린다거니 어느 곳에는 바람이 분다거니, 박명의(49ㆍ솔뫼공동체) 생산자를 만나러 가는 길, 일기예보에 민감한 귀가 먼저 몸살이다. 하물며 씨 뿌려 가꾸고 거두는 사람들이야 오죽할까. 거저 얻어지는 한 톨의 겨자씨 한 톨도 없는 법. 이제는 잎내린 빈 들판을 배경으로 색색의 사리(舍利)알 같은 토종종자와 남다른 사랑에 빠진 그녀를 만나보자.

 

상주시 화북면 입석리, 말 그대로 커다란 돌이 서있는 입구 갈림길 오른쪽 골목 막다른 곳이 그녀 집이다. 흐린 날씨가 갑자기 개인 듯 눈앞이 환해진다. 곶감 커텐이다. 주홍 곶감에 빼앗긴 시선을 돌리려는 듯 맞은편 마당귀퉁이 백골을 드러낸 수세미가 늠름하고 아직은 무른 서리태며 수수ㆍ감말랭이가 제 몸을 말리고 있다. 금이 간 무쇠솥에선 고구마가 구워지고 아궁이 앞으로 이끄는데 이 얼마만인가.

부뚜막 위에도 역시 한해를 건강히 살아낸 씨앗들이 제각각의 빛깔과 모습으로 ‘도시촌놈’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박씨를 닮았으나 날렵한 맵시 수세미씨가 한 양푼, 잠자리날개를 걸친 듯 아주까리밤콩 한 바가지, 말안장을 꼭 닮은 선비잡이콩 한 쟁반, 금강산 관광지에서 왔다는 윤기나는 녹두, 검붉은 갓끈동부, 조롱박, 옥수수, 자잘해도 오곡이라 황차조며 메조가 매달린 그을음 정겨운 그녀의 집. 한자리 차지한 나무절구 사연인즉 이제는 도정(搗精)해주는 곳이 없어 손수 절구질을 해야 할 때도 있어 절구통이 필수란다.

 

 

어찌 보면 고생을 사서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품어안고 사는 저 많은 씨앗만큼 사연이 있을 법한 박명의 생산자. 그이는 처음에 큰 산이 있는 주변 환경 속에서 효소나 나물에 관한 일을 해보고 싶었단다. 승주와 거창을 거쳐 5년 전 지금의 상주에 이르기까지 12년 동안 농사꾼으로 살고 있다. 농사초기 손수 지어먹어도 옛 맛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특히 콩 중에 ‘청태’가 예전에 그 맛이 아님을 알고, 전에 먹었던 그 품종을 찾기 시작했다. 이를 계기로 우리 토종종자에 눈을 돌린 후 “먹기만 하고 뿌리지 않으면 용납이 안 된다”며 토종 외 일반 종자까지 100여 가지 작물의 씨받이를 해내느라 쉴 참이 없다. 시중의 종자는 그해에는 때깔 좋고 크기도 하지만 재발아나 수정은 어렵다고 한다.

“토종이란, 우리 역사고 땅의 기운을 계속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모습을 그대로 드러내죠. 농민의 정신이자 마음이기도 하구요.” 몇 해를 거듭해 심어 거두고 해마다 만일을 대비해 조금 남기는 지혜가 필요하다. 소량 재배시 다른 종과 교배되어 변종이 생기는 경우도 있어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하고 나중에 다시 받아 순수 종을 유지해가고 있다. 이렇듯 우여곡절 많은 토종종자와 한판 한해를 살아나온 그녀의 거친 손에 ‘그대로 드러난 자기모습 농민의 정신’이 오롯이 담겨있다.

 

 

무멀칭 노지재배 고집도

삼천오백평 농사일에 조금은 지치고 한계를 느낄 때가 있지만 혼자만의 뿌듯함에서 머물지 않고 충주제천지역 소비자 48가구와 함께 하고 있는 ‘꾸러미사업’에도 앞장서고 있다(한살림충주제천 진행). 주력가구 2가구와 보조 가구가 공급하는 꾸러미상자의 내용물은 실로 놀랄만하다(5~10월 매주/ 11~12월 격주/ 평균 13.7가지/ 전체 150가지). 더 중요한 것은 ‘자가 채종한 토종종자로, 가능한 무멀칭 노지재배’를 실천하려고 애쓰고 있다는 것이다. 일이 많고 힘들 수밖에 없지만 욕심 부리고 채산성을 따지는 것이야말로 재앙 속으로 몰고갈 뿐이라고 믿는다.

 

“사실 제철에 나오는 것만 먹고 살아도 충분해요. 그러려면 토종 것만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한 가지 예로 상추는 원래 5월 중순이면 꽃대가 올라와 먹을 수가 없는데 사시사철 먹어요, 꽃대도 올라오지 않고 병충해를 견디는 변형된 것들을. 알면서도 어쩔 수 없이 요즘에 맞게 농사를 지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지요.”

 

보석같은 토종종자들을 보듬어 사진에 담다

난생 처음 보는 종자들도 종자려니와 모양새나 일년살이에 걸맞게 예쁜 이름들에 끌린 토종종자 이야기. 가장 애착이 가는 것은 콩 중에 청태며, 불리거나 삶지 않고도 밥에 넣어 먹을 수 있는 붉은이팥은 작아서 골라 낼 수도 없어 아이들에게도 제격이라고, 데쳐먹는 여린 잎의 어금니동부, 작두콩, 콩나물용 연두ㆍ노랑ㆍ검정 질근(기르다)콩, 올서리태, 밤콩, 쥐눈이… 마당 가득 늘어놓고 사진 찍을 때면 보석상 같다는 그녀.

천지간에 그녀의 땀과 손을 기억하는 저리 많은 초롱초롱한 것들이 내생을 기약하는 동면의 시간, 봄날 뜨거운 두엄더미와 게알마냥 부서지던 아버지의 밭고랑 같은 정열로 다시 달궈지는 가슴을 느끼며 돌아서는 내 뒤꿈치가 천근만근이다.

 

“제대로 농사짓고 싶어요. 거름 제대로 만들어 삭히고 땅도 제대로 만들어 나중에 허탈하지 않도록….”

 

 

한살림서울 소식지, 한살림사람들 2012년 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 이미경 한살림서울 홍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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