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안 구량천공동체 – 정영순·권혁천 생산자

여보, 나는 내 자신이 너무 기특해

 

정영순 씨는 “여자가 남자보다 조금 밑이라고 보는 사람한테는 내가 너무 강하다고 느껴질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강하다기보다는 당당하다는 게 어울렸다.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꺼내는 한마디 한마디는 분명하고도 합리적이었다.

그는 생각하는 농부, 생각한 대로 사는 농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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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간만에 사진 찍어 보네요.” 매일 수시로 들르는 육묘장이지만, 카메라가 있으니 왜 이리 어색한지 모르겠다. 정영순 씨는 농사짓는 게 육체적으로 힘들지만, 남한테 간섭 안 받고 나한테 맞춰 살 수 있는 게 좋단다. 남한테 보여주기 위해 사는 게 아니라 오롯이 나에게 맞게 사니, 힘들어도 그날그날 회복된다고.

 

 

농촌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정영순 씨를 만나러 가는 날, 겨울은 온데간데없고 거짓말처럼 날씨가 따뜻했다. ‘날이 이렇게 좋으니 농사 준비로 바쁜 건 아닐까’ 걱정됐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 권혁천 씨에게 새참을 갖다 주고 총총 돌아오는 모습에 분주함이 묻어났다. 시간을 오래 뺏으면 안 되겠다 싶었는데, 이야기 듣는 데 정신이 팔려 결국은 생각처럼 되지 않았다.

경기 성남에 살던 부부는 1997년 4월 전북 진안으로 귀농했다. 정영순 씨가 37살, 권혁천 씨가 40살이었다. 귀농을 결심한 가장 큰 이유는 아이들이었다. 아들만 둘이다 보니 인터넷 중독이나 학교폭력 등 걱정되는 게 많았다. 학원에 가지 않는 아이들은 친구를 사귈 수가 없었다. 마음껏 뛰놀 공간도, 좋아하는 자전거를 탈 만한 곳도 없었다. 또 남편이 체력이 약해 자주 아팠는데, 아이들은 도시에서 건강하게 자랄지 의심스러웠다.
그러다가 김영원 선생이 쓴 《효선리 농부의 세상사는 이야기》라는 책을 읽고, 농촌에 살고 싶다는 마음을 품게 됐다. “그런데 우리 둘 다 농촌에서 산다는 게 어떤 건지 모르니까 무서운 거예요.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까 걱정도 되고.” 그때 정영순 씨가 붙잡은 건 ‘농촌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래, 농촌으로 가자, 내가 직접 농사지어서 애들을 먹이자’고 결심했죠.” 애들이 각각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때였다.
특별히 연고도 없는 이곳에 터를 잡은 건 전부터 알고 지내던 허병섭 목사와의 인연 때문이었다. ‘달동네 성자’로 불리며 도시빈민운동을 해 온 허 목사는 1996년 진안 옆인 무주로 내려와 있었고, 부부는 허 목사를 통해 지금 이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장 힘든 건 농사지을 땅을 구하는 일이었다. 일단 파는 땅이 별로 없었고, 땅이 나오더라도 기존 주민들에게 먼저 팔거나 임대해 버려 차례가 돌아오지 않았다. 힘들게 땅을 빌려도 어려움은 끊이지 않았다. “우리가 유기농업하다 보니 농지를 많이 가꾼단 말이에요. 비료·농약도 하지 않고 돌도 추려내고. 그런데 3~4년 하다보면 땅 주인이 자기가 농사짓겠다고 땅을 가져가 버려요. 그러고는 1~2년 짓다 힘들어 못 짓겠다며 다른 사람한테 줘 버려요.”

 

지난 달 농지 문제를 다룬 특집기사가 떠올랐다. 농지가 부족하고 값도 비싸 실제 농사짓는 농부들이 겪는 피해는 글로 읽는 것보다 훨씬 컸다. 이 지역은 땅값이 굉장히 쌌는데, 이제는 평당 5~6만 원을 주지 않고는 땅을 살 수가 없단다. “임차농을 도와주는 정책이 필요해요. 한살림에서 땅을 사서 생산자에게 맡기는 방식 등으로요. 우리도 힘들지만 우리 후배들은 돈도, 땅도, 살 곳도 없어요. 그럼 농부 되고 싶어도 못 되는 거죠.” 특히 소농과 새내기 농부를 어떻게 지원할지 고민이 필요하다는 게 정영순 씨의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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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앞 천수답을 밭으로 쓴다. 매년 밭을 갈아엎는데, 이번에 둑을 손봤더니 돌이 많이 나왔다.

부부는 일일이 돌을 골라낸 이밭에 수박을 심을 것이다. 부부의 땀을 마신 수박은 아마도 무척 달 것 같다

 

 

1년에 한 번 하는 거니까, 끊임없이 배워야 해요

현재 부부는 소유한 2천645㎡(800평)와 임차한 9천917㎡ (3천 평)의 농지에 농사짓고 있다. 빌린 땅은 종중 소유라 다행히 15년 가까이 쓰고 있다. 다만 산지다 보니 평지에 비해 일이 몇 배는 힘들다. 게다가 한 가지 작물을 많이 짓지 않고 30가지가 넘는 작물을 조금씩 기르는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다 보니 더욱 그렇다. 그래서 한살림 전국 물류로 보낼 만한 양이 되는 것은 수박뿐, 고추·당근·감자·양파와 잎채소 및 잡곡 등은 한살림대전에 지역물품으로 낸다.
부부는 귀농 처음부터 유기농사를 지었다. 유기농에 대한 인식 자체가 없던 지역 사람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부부가 어떻게 유기농을 하냐며 비웃었다. 하지만 정영순 씨는 남들이 고추 100근을 딸 때 10근을 따면서도 유기농사를 이어 갔다. “자기들만큼은 못 따도 수확량이 있으니까, 어느 때부터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거예요. ‘유기농 고추가 있다고 생각도 못 했는데 유기농으로 되기는 되네’ 하는 이야기가 들려 왔어요.”
당시에는 유기농을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아 책도 많이 보고 교육도 찾아다녔다. 하지만 실제로 농사지으면서 시행착오를 겪지 않고는 알 수 없는 게 너무 많았다. 그래서 관행농사짓는 이웃의 일을 그냥 돕기도 했다. “배우러 간 거죠. 배추는 몇 센티미터 간격으로 심는지, 두둑은 어떻게 만드는지 일하면서 배우는 거예요. 직접 해보지 않으면 모르니까.” 이때는 새벽 5시부터 캄캄해질 때까지 엉덩이를 붙이고 앉을 새가 없었다. 그래도 정영순 씨는 아직도 배울 게 많단다. “농사는 1년에 한 번 하는 거니까. 60년 농사지어도 60번밖에 경험이 없는 거예요. 끊임없이 배워야하는 거죠.”
그는 유기농사를 포기하지 않고 지켜온 공을 남편에게 돌린다. “하도 배추 속이 안 차니까, 속이 찬 배추가 너무 먹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남편한테 농약은 안 하더라도 비료만 쳐 보자고, 팔 것은 말고 우리 먹을 거에만 치자고 했죠. 그랬더니 ‘비료 치기 시작하면 농약 치는 거고, 그럼 유기농은 할 수가 없다’고 딱 자르더라고요.” 남편 권혁천씨는 “한 번만 비료 칠 것이 아니라 한 번만 사다 먹으라”고 하더란다. 부부가 흔들리지 않고 온 건 남편 덕분이라고, 그이 혼자 했으면 변질됐을 거라고 말하지만 내 보기엔 그이도 만만치 않은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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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르는 작물 종류가 많은데다가 닭도 몇 마리 키우기 때문에 웬만한 건 다 자급자족한다.

 

여성들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미래 달려 있어

부부는 2000년부터 16년째 한살림 생산자로 활동하며, 지역에 귀농한 가정들을 모아서 공동체도 만들었다. 3년 전부터 여섯 가정이 ‘구량천공동체’를 이뤘는데, 동네에 흐르는 시내가 아홉 마을을 거쳐 온다고 해서 구량천이란다. 지난해까지 6년 동안은 한살림대전과 연결해 꾸러미 사업도 했다. 대전 물류센터까지 차로 40분이면 갈 정도로 가까웠기에 가능한 일이었지만, 너무 힘들어 올해부터 그만 하기로 했다. “보낼 것을 일일이 소포장해야 하니 손이 너무 많이 가요. 농사보다 그게 더 힘들더라고. 아무리 뜻이 좋아도 생산자가 지속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이라야 해 나갈 수 있겠더라고요.”
정영순 씨는 한살림 여성위원회 전북권역 대표로도 활동한다. 그런 만큼 현재 친환경 인증이나 한살림 물품 출하가 대부분 남성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데에도 주목한다. “인증 같은 경우는 한 사람 이름으로밖에 안 내줘요. 그러면 대부분 남편 이름으로 하죠. 당장 우리 집도 마찬가지에요. 삶에서는 동등하다 해도 모든 서류상 대표는 다 남편이에요.” 단순히 누구 이름으로 올라가느냐가 아니라, 여성이 생산자로서 제대로 인식되고 있느냐에 대한 문제 제기다.
또 여성 생산자는 기본적으로 부회장, 부대표 등 부차적인 역할만 하는 것도 이제는 바뀔 때라고 생각한다. “나는 하지도 않을 거면서 이런 말하는 게 좀 그렇다”고 망설였지만, 여성이 구색 맞추기만 할 게 아니라 대표도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싶다. “여성 생산자 모임도 먹고 놀려 주는 정도밖에 안 해. 강의 한두 꼭지 하고 ‘그동안 고생했으니까 쉬어라’ 이런 거거든요. 이렇게 하는 게 맞는 건가 생각이 들죠.”
생산자만의 문제는 아니다. 여성 생산자들이 만나는 실무자 대부분이 남성인데, 남편과의 관계나 남자들 사이에서 일하는 게 왜 힘든지 이야기해도 공감을 얻지 못할 때가 많다. “여자들을 보호해 주겠다고만 이야기하지. 그렇지만 우리 여자들은 보호받고 싶은 게 아니라 동등하게 인정받고 싶은 거거든요.” 한살림에 있으니까 이런 말이라도 할 수 있다는 그는, 앞으로 여성들을 어떻게 키우느냐에 따라서 큰 변화가 있을 거라고 말한다. 소비조합원을 비롯해 여성이 많고 가정 살림을 주고받는 게 주된 일인 한살림이, 일반 기업보다도 오히려 더 남성 중심적이면 안 된다는 생각이다.

 

하지만 그는 남성들을 탓하는 것은 경계했다. 어느 한쪽 성별 때문이 아니라 고정관념과 낡은 사회구조 때문이라는 것이다. 좋은 게 좋다고 넘어갈 게 아니라, 문제를 정확하게 보고 함께 풀어 가면 좋겠다. 특히 앞으로는 여성이든 남성이든 결혼하지 않은 생산자가 늘어날 텐데, 이에 대비해 남성 위주로 되어 있는 사고와 정책들을 바꿀 필요가 있을 거라고 덧붙였다. 그래서 농사일 중간 중간 빠져나가는 게 쉽지 않아도 이런저런 활동을 이어 가고 있다. “아무것도 안 할 수는 없잖아요. 생산자의 사정을 생산자가 알려야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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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 국화꽃을 따서 한 번 찌고 말려 차로 만들었다. “일부러 차를 마시는 것도 있어요.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그냥 일하러 나가게 되거든. 여유를 만드는 거죠.”

<우> 다품종 소량생산을 하다 보니 고추, 부추, 청경채, 양상추, 대파 등 모종 종류도 많다.  모종들에는 매일 물을 줘야 하는데, 위에만 살짝 주면 금방 말라 버려 듬뿍 뿌린다.

“물이 너무 차갑지 않게 받아 놓고 뎁혀서 써요.”

조금만 방심하면 실패하기 쉬워 어린아이 다루듯 보살핀다.

 

 

농사로만 모든 삶을 만들어 간다

결혼하고 쭉 시동생·시누이들과 함께 살다가 귀농해서 처음으로 부부와 아이들끼리만 살게 됐다. “아이들과 삼시세끼 밥을 같이 먹을 수 있는 것만 해도 좋았어요. 도시에서 가게 할 때는 애들이랑 같이 밥 못 먹었죠. 여기서는 죽으나 사나 같이 먹고 부대끼고.” 그러다 아이들이 기숙사 생활을 하는 풀무농업고등기술학교로 가고부터야 부부끼리만 산다. 도시 살 땐 입에도 대지 않던 술도 한두 잔씩 하고 민화투도 치며 지낸다.
부부는 농사뿐 아니라 사회에 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눈다. “우리는 말이 잘 통해요. 귀농하는 것부터 같이 결정했고, 지금도 1년 농사 계획을 철저하게 의논해서 해요.” 건강한 먹을거리에 대한 생각이나 사회의식이나 모두 같이 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그는, 평등한 부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그래서일까. 그는 할 말은 다 하고 살았기 때문에 가슴에 맺힌 게 없어 속병이 없다고 했다. 게다가 남편과 24시간 함께 있는 게 “재밌다.”
이웃들이 “덕유산 꼭대기에 갖다 놔도 살 사람들”이라고 했을 만큼 열심히 살아왔다. 지금은 아침밥 먹고 차 한 잔 느긋하게 마실 정도는 됐다. 이런 호사를 누려도 되나 싶기도 하지만, ‘나한테 이 정도 휴식은 줄 수 있는 거 아닌가’ 생각한단다. 그는 가끔 남편한테 이렇게 말한다고 했다. “여보, 나는 내 자신이 너무 기특해. 내가 이렇게 살 수 있는 것도, 지금까지 견뎌 온 것도.” 어디 휘둘리고 마음 끓이지 않는 요즘이 좋다는 그는 지금 이 순간까지 온 게 꿈만 같다고 했다. 하늘의 뜻을 안다는 지천명의 나이를 제대로 겪어 내고, 큰 굴곡 없이 조금씩 나아지는 지금의 삶이 평화롭다.
다만, 이제 ‘일머리’가 생길 만하니까 힘이 빠진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처럼 왕성하게 일할 수 없을 텐데, 다음 세대가 걱정이다. “요즘 사람들은 아무리 돈 많이 벌고 판로가 좋다 해도 우리처럼 힘들게 농사 안 지어요. 어떻게 하면 쉽게 일할까를 생각하지, 건강한 일이냐를 보지 않아요.” 그래서 처음부터 생명에 대한 가치를 갖고 농사지으러 오는 사람들을 붙잡아야 한다는 게 그의 말이다. 생명사상이 없는 농부들은 정부지원금 등 돈을 보고 유기농사를 시작했다가 돈이 안 되면 바로 포기한다. 그런 사람들이 “유기농이 어딨냐, 농약 안 치고 농사 절대 안 된다”라고 이야기하는 경우도 많다.
유기농사지으려는 사람들을 늘리려면, 지금 생산자들의 삶의 질이 높아져야 한다. 내 삶이 너무 궁핍하면 이렇게 살라고는 못할 터이다. 정영순 씨는 지금 내가 행복해야 젊은 사람들이, 그리고 내 아이가 농사를 이어받을 수 있다고 믿는다. “한살림은 이어져야 하잖아요. 우리 자리를 메우는 건 젊은 사람들이에요. 우리가 터를 잘 닦아 놔야 내가 농사짓는 걸 좋다고 보고 뒤를 이을 수 있겠죠.”
처음 귀농할 때부터 부부는 계속 이야기했다. “우리는 농사로만 모든 삶을 만들어 가자.”고. 지금까지 그걸 지키며 살고 있는 게 정영순 씨의 가장 큰 자랑거리다. 그는 일을 크게 벌이는 성향이 아니라고 했다. 그래서 농사를 크게 지어 큰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크게 망하지도 않는다. 조금씩 여러 가지를 지으니 이게 잘 안 되면 다른 걸로 보완한다. “도시에서 농촌으로 온 게 제일 큰 모험이었다”는 그는, 19년 동안 유기농사를 지어 안전하고 건강한 먹을거리를 나눠 먹을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에 자부심이 있다.
앞으로도 소비자의 평가를 받는 생산자가 아니라 건강한 먹을거리를 책임지는 당당한 생산자로 살려고 한다. 지금처럼 건강하게 농사지으면서, 다른 생산자들도 다독이고 싶다. “내가 건강하면 기분 좋고 행복하니까 남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요. 한살림 사람은 ‘한살림답게’ 사는게 당연해요. 그러려면 건강이 기본이 되어야 하고요.”
정영순 씨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나도 이런 여성이고 싶었다. 바뀌어야 할 문제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하기보다 멀리 내다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 남편과 허물없이 어떤 이야기라도 나누며, 믿고 존중하는 부부로 살고 싶다. 짧은 시간 보고 성급하게 판단한 것 아니냐고? 그럴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는 이미 내게 본이 되는 삶을 보여 주었으니, 내 몫의 자부심을 더 가지면 좋겠다. 또다시 일 년 농사 시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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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둑을 하나 쳐도 방법이 다르다”는 부부. 의견 차이는 언제나 있지만 늘 대화로 문제를 해결해 왔다. 정영순 씨는 남편이 고집 센 걸로동네에서도 알아준다며 흉 아닌 흉을 봤지만, 말에는 존중과 신뢰가 묻어났다.

 

 

살림이야기 제35호 2015.04  땅땅거리며 살다

글 이선미 편집부 / 사진 류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