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축회 – 안상희 생산자

한 알의 밀알처럼 괴산에 뿌린 씨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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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세상에 희망이 있을까 싶어지는 순간이 있다. 한국은 유래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었고 웬만하면 고기도 배불리 먹게 되었다. 그러나 ‘정신의 허기’니 하는 관념적인 소리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우리가 과연 ‘잘 먹고 잘 살게 되었을까?

지난겨울, 조류독감 때문에 산 채로 파묻은 닭과 오리만 2천500만 마리가 넘는다고 한다. 2010년 구제역 파동 때도 방송으로 소, 돼지 수백 만 마리를 파묻는 광경이 연일 중계되는 걸 보면서 이게 지옥이 아니고 무엇인가 싶어 참담했다. 지옥은 욕망에서 빚어질 것이다. 욕망의 극단적인 좌절이 고통이고 그 궁극이 지옥일 테니 말이다.

 

산 생명을 떼로 생매장하는 일이 무슨 합리적인 조치인 것처럼 보도되는 것을 지켜보는 일도 무척 힘겹다. 최근에야 이 참극이 ‘공장식 축산’ 때문에 빚어졌다는 여론이 고개를 들고 있다. 오로지 빨리 키워서 잡아먹겠다는 욕망이 가축을 밀집시켜 ‘생산’하고 이 때문에 가축들의 저항력을 떨어지고 질병도 빠르게 확산된다는 진단 말이다. 맹목으로 욕망을 좇으면 만족도 비례해서 커질 것 같지만 아쉽게도 결과는 정반대라는 것을, 이제 조금씩 이해할 것 같다.

 

안상희 씨는 1986년 한살림이 출발하던 해에, 이제는 ‘눈비산마을’이 된 충북농촌개발회에 합류해 그곳에서 2000년 3월까지 살았다. 그곳을 나온 뒤에도 2003년부터 괴산에서 한살림에 소와 돼지를 키워서 내는 축산 생산자들의 공동체인 한축회(한살림축산생산자연합회) ‘간사’ 일을 해왔다. 관행대로라면 모임을 꾸리고 이끈 사람이 전무나 대표를 해도 어색할 게 없었겠지만 스스로 간사를 고집해 지금에 이르렀다.

 

눈비산마을은 알려진 것처럼 햇빛과 바람이 잘 통하는 닭장에 짚과 풀, 왕겨를 깔고 암탉과 수탉이 자연에 가깝게 어울려 자라게 해놓은 ‘야마기시식’ 양계를 통해 유정란을 생산하고 있다. 눈비산마을에 실제로 가본 이들은 늠름하게 벼슬을 세우고 있는 장닭들과 공중에 떠있는 산란 상자에 들어가 편안하게 알을 낳는 암탉들이 정답게 어울려 있는 광경에 어떤 안도감마저 느끼게 된다.

 

안상희 씨는 한살림이 세워 놓은 동물복지나 생태순환 같은 축산 원칙과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눈비산마을에 첫 유정란 닭장을 지을 때부터 그 일을 함께 했고 한축회에서 소나 돼지도 톱밥이나 왕겨가 깔린 축사에 암소 한 마리당 9.9㎡(3평)을 고삐 묶지 않고 풀어 키우고, 돼지도 다섯 마리당 6.6㎡(2평) 이상 공간에서 항생제가 섞이지 않은 사료를 먹고 뛰놀며 자랄 수 있게 하는 등의 기준을 정하는 데에도 깊이 관여해왔다.

 

그러나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지금처럼 고기를 많이 먹으면 대책이 없다.”는 말을 해왔다. 고기를 당장 끊을 수 없다면 절제하고, 먹는 고기도 가급적 생태적인 순환과 농사까지 고려한 대안적인 것을 택하자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고기를 소비하는 일이 숨 쉬는 가축을 키워서 잡는 과정에 닿아 있다는 것을 우리는 종종 잊는다. ‘양념 반 프라이드 반’ 같은 배달음식이나 비닐 랩에 쌓여 진열대에 말끔하게 놓여 있는 ‘생등심’을 보면서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다. 육식은 이제 가공식품의 포장을 뜯어 간편하게 식욕을 채우는 일과 다르지 않다. 고기는 곡식이나 채소에 비해 더욱 미각을 자극하고 식욕을 부추긴다. 오랜 세월 동안 특권층들이나 누리던 고기 먹는 일에 포한이 진 때문인지 고기 소비는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다.

 

통계청에 따르면 소고기는 2004년 1인당 31.3kg에서 2012년 40.5kg으로 늘었고 쌀 소비는 2004년 82kg에서 2013년 69.8kg으로 줄었다. 극단적으로 말하면 사료곡물로 키운 고기는 형질이 바뀐 곡물이라고 할 수 있다. 고기를 먹는 일이 단순히 식재료 선택이나 기호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공무원에게 직접 편지를 써 보낸 고등학생

안상희 씨는 괴산군 소수면 옥현리에서 태어났다. 눈비산마을과 산을 사이에 두고 있는 마을이다. 1948년생이니 우리 나이로 예순여섯이 넘었다. 눈비산마을을 이끌어온 조희부 씨와 동갑이라고 했다. 안상희 씨는 삼십대 후반이던 1986년에 눈비산마을에 들어가 2000년 3월, 쉰 살을 훌쩍 넘길 때까지 살았다. 그들이 눈비산마을에 청춘을 바쳤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안상희 씨의 부모님은 괴산에서 멀지 않은 음성군 원남면 출신인데, 70년 전에 도토리 서 말을 가지고 살림을 나와 옥현리에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보리나 쌀도 아니고 산에서 나는 도토리 서 말….

 

안상희 씨는 음성고등학교 양잠과를 졸업했다. 매사 빈틈없고 부지런한 아버지 덕에 그는 마을에서 처음으로 고등학교에 진학한 학생이 되었다. 수천 년 전통을 가진 우리 잠업은 세계에서 기술을 인정받고 있었고 농업을 빼고는 이렇다 할 산업이랄 게 없던 시대라 나라에서 집중 육성하고 있었다. 그는 고등학교 때 ‘남다른 짓을 저지른’ 적이 있다고 했다.

 

그가 다닌 음성고등학교 잠업과는 실습용 누에를 키울 뽕나무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그는 이런 사정을 충청북도 잠업과장에게 직접 편지에 써서 호소했다. 별 기대를 하지 않고 한 일인데 뜻밖에도 당시 잠업과장이던 김진해 씨로부터 ‘묘목 천 그루를 지원해주겠다’는 답장이 왔다. 그는 지금도 그 편지를 간직하고 있다. 고등학생의 편지를 관심 있게 읽어준 공무원도 대단하지만 그런 편지를 써 보낼 엄두를 낸 어린 고등학생도 예사롭지 않게 여겨졌다. 편지를 받고 그는 “가슴이 뛰었다.”고 했다.

 

중학생 때 일도 재미있다. 다들 가난하게 살던 시절이라 그도 부모님께 도움이 될까 해서 중학교 2학년 때 닭을 키웠다. 닭이 늘자 계사를 늘려짓기 위해 음성군 금왕읍 친척집으로 흙벽돌 찍는 기계를 가지러 간 적도 있다. 쌀가마보다 더 무거워 결국 옮겨오지는 못했지만 소년 안상희의 기질이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고향 마을 첫 고등학생이던 안상희 씨는 역시 마을에서 배출한 최초의 공무원이 된 뒤 1970년 스물세 살 때 두 살 연상인 연재순 씨와 결혼했다. 연애 같은 건 감히 할 엄두를 못 냈다. 부모님이 정혼을 했고 붓 벼루 들고 가서 신랑신부의 사주를 써서 교환한 게 결혼 준비의 모두였다. 그렇지만 부부는 평생 서로를 각별히 위하며 가정을 꾸려왔다.

 

지나치다싶게 자기주장과 권리의식이 강해진 요즘 젊은 세대들로서는 이해가 쉽지 않은 부분일 것이다. 10년쯤 공무원 생활을 하던 그는 1979년에 돌연 사표를 냈다. 바로 얼마 뒤 영원할 것 같던 유신통치가 막을 내렸다. “제도권에서 받는 스트레스가 싫었고, 연로하신 부모님을 대신해 농사를 이어가야겠다.” 싶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경우 바르지 않은 일에는 타협이 없는 성정으로 유신독재 치하에서 공무원으로 사는 일이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농부로 마을에 돌아와 부모님이 돌아가실 때까지 꼬박 고향 전답을 지켰다. 고추농사와 벼농사를 했는데 처음에는 농약을 많이 쳤다. 그 즈음에는 그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고 했다.

 

‘청석골’을 방불케 하는 괴산 눈비산마을

농사를 지으면서도 바깥 활동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5공화국 치하에서 안상희 씨는 민정당 소수면 조직책임자 역할을 했다. 당시의 흐름으로는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공무원 출신으로 서슬 퍼런 민정당의 제안을 거부하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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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내무부 장관 출신 김종호 씨를 당선시킨 뒤 그는 “그쪽으로는 아예 발길을 딱 끊었다.”고 했다. 눈비산마을을 이끌어온 ‘조희부 씨와 인연을 맺은 것’도 이 무렵이다. 그 전에도 면식은 있었다. 서울 법대를 졸업한 학생운동 출신 조희부 씨가 그 무렵 괴산에 내려와 있었다. 당연히 그는 사찰 대상이었고 전담 형사가 졸졸 따라다닐 정도였다. 그가 잠시 인천 와이엠시에이 간사로 갔다가 다시 돌아온 일도 안상희 씨는 소문으로 들어 알고 있었다. “조희부가 다시 돌아왔다며” 공무원들뿐만 아니라 지역의 사람들이 만나면 이런 이야기가 나돌 정도였다.

 

눈비산마을은 한살림 초기에 중요한 축이었고 지금도 매년 수많은 조합원들이 찾아와 견학을 하고 있다. 눈비산마을은 1968년 미국 메리놀선교회에서 파견한 천주교 청주교구 소속 신부들이 괴산가축조합을 만들고 시범 목장을 설립하면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1974년에는 ‘충북육우개발협회’로 전환해 송아지 계약 생산, 축산기술과 협동조합 교육 등을 진행했고 1981년에는 충북농촌개발회로 이름을 바꾸고, 종합적인 농촌 개발에 나섰다.

1987년부터는 ‘야마기시식’ 유정란을 시험 생산하고 1990년부터 본격적으로 한살림에 유정란을 내고 있다. 괴산에 뿌리박고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야망’이 그 무렵 눈비산 마을에 모인 분들 마음속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던 것 같다. 안상희 씨는 괴산이 ‘지금처럼 된 것’은 순전히 “조희부 한 사람으로부터 시작된 일”이라고 했다. 1980년 사표를 낸 안상희 씨가 괴산을 떠나려고 한다는 소문이 조희부 씨의 귀에 들어갔는지 우연히 마주친 자리에서 “괴산 떠나실 때는 저와도 좀 상의를 해 주시죠.” 이런 말을 흘리듯이 던졌다고 한다. 마치 괴산 출신 홍명희가 쓴 《임꺽정》에서 꺽정이와 의형제들이 인연 따라 만나 서로를 알아보며 천하를 도모하는 광경만큼이나 드라마틱한 이야기다.

 

실제로 1986년, 안상희 씨는 눈비산마을에 합류했다. 일만 같이 한 게 아니라 아예 들어가 함께 살았다.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지만 눈비산마을에 들어와 함께 산 이들 대개가 인생의 한 시기를 사적 이익이 아니라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위해 바쳤다. 주변에서는 조희부 씨가 “삼고초려해서 안상희를 데려갔다.”고들 수군댔다. “왜 하필 민정당에 참여했던 이를 합류시켰냐”고 투덜대는 이들도 있었다. 안상희 씨뿐만 아니라, 1995년부터 12년 동안 괴산군 군의원을 역임하고 마지막 4년 동안은 군의회 의장까지 지낸 이재화 씨, 흙살림 이태근 회장, 한살림축산가공식품 송영호 씨 같은 이들이 모두 눈비산마을 출신이다. 비유가 어울릴지 모르겠으나, 청석골에 모였던 임꺽정의 형제들처럼 말이다.

 

괴산군은 2015년에 세계 유기농산업엑스포를 연다고 한다. 그런 엄두를 낸 데에는 괴산에 그만큼 유기농업을 하는 농부들과 관련 기반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현재 괴산군에는 눈비산마을을 비롯해 감물흙사랑공동체, 느티나무공동체, 상무문장대유기농공동체, 솔뫼농장, 칠성유기농공동체, 한축회 등 10개 공동체 220여 세대가 생명이 살아있는 농사를 짓고 있다. 그뿐 아니라 한살림축산가공식품, 괴산잡곡처럼 인근 지역 농축산물을 가공하는 생산지까지 포함하면 모두 400여 명이 2013년에만 450여 억 원어치 농산물과 가공식품을 한살림에 냈다. 괴산지역이 이렇게 유기농과 마을 공동체 기반을 갖추게 된 것이 그저 우연이 아니었던 것이다.

 

내가 닭을 키우는 건지, 닭이 나를 키우는 건지

“오래 있었지, 눈비산마을 계사를 한 동 빼고는 다 내가 있을 때 지은 거니께. 돌아가신 박재일 회장님이 한살림에 유정란이 필요하다고 하시니까 (눈비산마을에서) 처음 닭을 시작했는데, 처음 병아리 350마리를 같은 방에서 자면서 계사에 넣을 때까지 돌봤어. 그중에 다섯 마리도 안 죽였다니께.”

 

이렇게 각별한 정성이 ‘암수 서로 정답게 어울려 낳은’ 한살림 유정란을 탄생시킨 것이다.

 

“닭들은 해준 만큼 어김없이 보답해. 사람은 안 그럴 때도 많잖아. 그런데 닭을 계속 키우다보면 내가 닭을 키우는 건지 닭이 나를 부리는 건지 헷갈릴 때가 있다니까.” 비슷한 말을 전에도 들은 적이 있다. “닭들이 일요일이나 명절 맞춰 알 낳는 게 아니니까 365일 계속 수발을 들 수밖에 없다.”는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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는 눈비산마을에 들어가 사는 동안 한살림을 세운 박재일 회장이나 그의 친구 김지하 시인, 그리고 눈비산마을을 여전히 지키고 있는 조희부 같은 분들을 만나면서 자신의 생각이 “굳어지고 깊어졌다.”고 했다. 그는 눈비산마을 닭들이 1만3천 여 마리로 닭이 불어날 때까지 그곳에서 기틀을 다졌다. 2003년부터는 한축회를 결성하는 데 앞장서고 조직을 이끌었다. 그러나 한 번도 대표이거나 전무 같은 직책을 가진 적이 없다. 그저 ‘안 간사’였고 지금도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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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무렵부터 한살림 소비자들이 논지엠오(Non-GMO) 사료를 이야기하기 시작해요. 당시 눈비산마을 닭 사료 가운데 60%가 수입 옥수수, 나머지 40%가 풀이나 그런 것인데, 옥수수만 하루에 700kg이 필요해요. 옥수수 350kg를 기르자면 땅이 300평(991㎡) 필요한데, 매일 600평, 일 년이면 22만 평 옥수수밭이 필요해. 닭들이 그만큼씩 먹어치우니 이건 견딜 재간이 없지. 우리나라에 그만한 땅도 없고 한살림은 무리를 해서 어떻게 꾸려간다고 칩시다. 온 나라 육식을 감당할 수 있겠냐고….”

 

그는 소비자들에게 계산을 해가며 설명을 했다. 어쨌든 한살림에서는 2009년부터 논지엠오 사료로 키운 닭이 낳은 유정란을 일부 내고 있다. 논지엠오 사료라고는 해도 국내에서 키운 옥수수는 아니고 해외에서 논지엠오 인증을 받은 수입 곡물을 들여와 항생제 등의 첨가물을 뺀 사료 정도다. 그런데도 무항생제 유정란 열다섯 알이 4천800원인데 논지엠오 유정란은 6천700원으로 가격차가 크다. 설령 국산사료만으로 닭을 키워 유정란이나 닭고기를 낸다고 해도 가격은 상상 이상 올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무리 따져도 고기 소비를 줄이는 것 말고는 답이 없다.

 

 

 

 

 

“그나마 소는 조사료 때문에 논지엠오 사료가 가능해요. 돼지도 작년부터 우리보리사료를 내면서 옥수수를 다 빼고 있고 올해 9월부터는 한살림 모든 돼지사료에서 옥수수를 뺄 수 있을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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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을 높이자고 남아도는 옥수수를 먹여서 키운 가축에 지방을 축적하는 오메가6가 과다하게 들어 있다는 방송이 사람을 놀라게 했다. 한살림은 이 보도가 나오기 훨씬 전부터 수입 옥수수 의존을 줄이고 국산사료 자급률을 높이기 위해 꾸준히 노력해왔다. 건초나 볏짚 같은 조사료를 섞어 2009년 3월에 티엠알(TMR; Total Mixed Ration, 완전혼합사료) 사료 공장을 세워 스스로 사료를 조달하고 있다. 강변에 자라는 풀들이나 볏짚, 콩깍지 같은 유기농 농사부산물, 겨울철 빈 논밭에서 키운 호밀 같은 사료작물들을 곡물에 섞어 만드는 사료가 티엠알 사료다.

 

지난해부터는 ‘우리보리살림돼지’를 통해 보리농사도 지키고 수입 옥수수 사료 의존도 줄이고 있다. 정부에서 2012년부터 보리수매제를 포기하면서 보리농사는 더 이상 유지되기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쌀과 함께 ‘주곡’의 자리를 지켜온 보리농사가 아예 끊기게 생긴 것이다. 보리 소비도 급감했다. 우선은 보리농사를 유지하는 게 시급하고, 생산된 보리가 당장은 수요가 적기 때문에 발아시켜서 수입 옥수수 사료를 대체하자는 것이 한살림의 ‘우리보리살림돼지’, ‘우리보리살림사료’가 탄생한 배경이다. 보리를 발아시키면 소화흡수율이 높아지고 돼지들이 옥수수 못지않게 잘 먹는다고 한다.

 

이 사업 시행 첫 해인 2013년에만 한살림은 우리보리 농지 109만900㎡(33만 평)을 확보했고 2014년 이후로는 닭과 소 사료까지 확대해 462만8천㎡(140만 평)이상을 확보할 수 있다고 한다. 만약 국제 곡물가격이 폭등해 원활하게 수입을 하지 못하게 되면 이렇게 키운 보리를 사료가 아니라 식량으로 전환할 수 있기 때문에 ‘식량안보’ 차원에서도 이는 중요한 일이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하다 보니 점심때가 지났다. 밥을 먹으러 가자며 안상희 씨는 ‘더블캡 트럭’에 나와 사진 기자를 태웠다. 눈 쌓인 천변 비포장도로를 달리는 트럭에서 그는 카세트테이프를 꾹 눌렀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나 들을 법한 떠들썩한 트로트 장단이 적막한 겨울 천변에 울려 퍼졌다. ‘내 나이가 어때서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다 ~’

 

“지난 주말에 결혼식에 갔다 오다가 고속도로 휴게소에 샀어. 어때? 가사가 재미있잖어”

 

그는 이제 곧 한축회마저 떠날 생각이라고 했다. 이 글이 지면에 실릴 때쯤이면 이미 그나마 유지해오던 한축회 간사 직책마저 내려놓았을 것이다. 민물고기로 매운탕을 끓여 내는 식당에 앉아, 그는 남은 생애에는 고향마을에 돌아가 토종씨앗을 보존하고 확산하는 일에 매진하고 싶다고 했다. 알다시피 한국만이 아니라 온 세상 농업은 이미 다국적농업회사들이 장악했다. 몬산토의 씨앗을 매년 새로 사고 그 씨앗에 맞는 농약도 사야만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 농부는 굶어죽어도 씨앗을 베고 죽는다는 말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대지의 힘으로만 작물을 기르고 거기서 채종을 해 농사를 이어가는 게 독립운동만큼이나 절박한 일이 되었다. 그가 우리 씨앗을 지키고 퍼트리는 일에 여생을 바치겠다고 결심한 것도 이 때문일 것이다.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는 말. 열망이 있는 사람에게 나이는 개의할 바가 아니다. 평생 마음에 중심을 세우고 수행하듯이 운동의 한길을 달려온 그의 가슴에 또 다시 토종씨앗이라는 화두가 들어와 사랑의 열망처럼 싹트고 있는 것이다. 씨앗은행이든 시범포든 그는 당장 올해부터 그 일을 하겠다고 한다. 이런 마음이 사랑이 아니면 무엇이겠는가? 그의 지금 나이가 사랑하기 딱 좋은 나이라는 말이 과연 억지일까?

 

글 김성희 편집위원\사진 류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