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한울공동체 – 신만균·허연숙 생산자

호텔보다 더 편안한 삶

흙에서 일군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시인 이성부는 봄을 기다리는 마음을 이렇게 노래했다. 이 시의 마지막 구절은 널리 알려진 것처럼 ‘너, 먼 데서 이기고 온 사람아.’ 이렇게 봄을 의인화해놓고는 그립고 반가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다.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춥고 눈도 많이 내렸다. 겨울이 혹독할수록 새봄에 대한 그리움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입춘을 하루 앞둔 날, 농부 신만균을 만나러 제주에 갔다. 1968년생이니 그는 올해 우리 나이로 마흔 셋이 되었다. 젊은 농부다.

입춘이기도 했고, 그래도 제주도인데 하는 느긋한 생각에 외투도 안 챙기고 재킷만 입고서 나선 길이었다. 그렇게 부실한 입성으로 그가 개간하고 있다는 중산간지대 돌밭에 따라나섰다가 무방비 상태로 마주친 제주의 바람은 혹독하게 매서웠다. 트랙터로 골라 둔 돌들은 허옇게 얼음을 뒤집어쓰고 얼어붙어 있었다. 흙을 일구는 삶은 어디랄 것 없이 이토록 고된 노동을 전제로 할 것이다. 노동의 고단함을 견디고도 그곳에 충분한 보상이 있다고 믿는 이들은 그 길을 기꺼이 선택할 것이다.
음울한 하늘에 눈보라마저 휘날리고 있었다. 어딘가 따뜻한 곳으로 피신해 몸을 녹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한참을 떨다가 점심때가 돼서야 그들 부부를 따라 순대국밥집으로 갔다. 곳곳에 흩어져 있는 밭에서 우리처럼 눈보라치는 칼바람을 견디며 일하다 밥을 먹으러 온 농부들이 뜨거운 국밥을 달게 떠먹고 있었다. 여전히 식당의 허술한 유리창 밖으로는 간간히 눈발이 휘날렸다. 사람들이 피워내는 체온이 실내를 훈훈하게 데워놓고 있었다.
“이 사람 호텔리어였어요. 잘 차려 입고 나서면 볼만했죠.”
허겁지겁 국밥을 떠먹고 있던 내게 그의 아내가 말해준다. 신만균은 대학에서 관광경영학을 전공하고 당연한 듯 큰 호텔에 취직해 7, 8년은 족히 그 곳에서 일했다고 한다. 쌍꺼풀 진 눈에 짙은 눈썹, 키도 훤칠한 그의 용모에 아내가 묘사하는 호텔리어의 복장을 덧입혀 상상해본다. 아닌 게 아니라 볼만했을 모습이 충분히 그려진다. 그만큼 준수한 용모를 지닌 이였다.
“어울리지 않는 옷을 입고 있는 것같이 불편했어요. 호텔은 서비스를 제공하는 곳이고 일의 특성상 자정 다 돼 일이 끝나요. 그 시간부터 시작하는 회식도 잦고 밤새 술을 마시는 일도 많았죠. 이렇게 살아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을 늘 했어요.”

 

 

 

그는 1998년 7년 넘게 일 해온 호텔에 사표를 내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굳이 햇수를 따지자면 그는 귀농 12년차 농부인 셈이다. 삶을 획기적으로 바꾸는 일은 그에게도 쉽지만은 않았다. 제주도라고 해서 사람들이 농사일에서 벗어날 궁리만 하는 것은 별반 다르지 않았을 텐데, 번듯한 호텔의 중견관리자로 자리잡아가던 그가 남들 보기에는 늘 좋은 옷을 입고 좋은 것만 먹으면서 아쉬운 것 없이 꾸려가던 삶을 중단하고 마을에 눌러앉아 농사를 짓겠다고 하자 주변 사람들은 싸늘하게 반응했다. 부모님은 화를 냈다. 이웃사람들은 ‘배가 불렀구나. 얼마나 견디나 두고 보자.’ 이런 냉소를 서슴지 않았다.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 그는 지금도 조상대대로 살아온 그 마을에서 살고 있다. 경기도 포천에서 군 복무한 동안과 호텔 근무에 필요하겠다싶어 일본에 어학연수를 받으러 갔던 때를 빼놓고는 떠나본 적이 없는 고향 마을이다. 고구마처럼 좌우로 길쭉하게 생긴 제주도에서 제주시로부터 해안을 따라 시계방향으로 달리다보면 이내 조천면의 관문인 신촌리에 닿는다. 예부터 ‘새마을’이라 불리다 신촌리로 명명된 바닷가 마을이라고 한다.
구멍이 숭숭 난 검은 현무암 돌담 너머로 가슴이 선득해지도록 푸른 바다에 잇닿아 있는 집에서 그는 갓난아이 때부터 한 마을에서 같이 자라난 동갑내기 아내 허연숙, 중학교 이학년이 된 큰 아들 성빈, 어린이집에 다니는 일곱 살짜리 둘째 아들 성익이와 함께 살고 있다. 뒤꼍으로 나서면 푸른 보리 싹이 화산섬의 검은 흙을 뒤덮고 있는 우영을 사이에 두고 이웃의 고만고만한 집들이 어깨를 기댄 것처럼 이어져 있었다.
신만균은 거창 신(愼)씨라고 했다. 이 신씨들은 신구범 전 제주도 도지사를 배출한 데서 알 수 있듯, 제주도에 많이 살고 있다. 본래 중국 성씨인데 고려 때 귀화했다고 한다. 그들 가운데 조선시대 인조 때 정묘호란을 피해 제주에 들어온 신명려라는 이가 제주에 모여살고 있는 이들 신씨의 기원이라고 한다. 농부 신만균은 처음 제주도에 들어온 조상으로부터 35대 손이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삼십 몇 대가 흘러 갈 때까지 그들 가족은 고향마을을 떠나지 않고 한 곳에 붙박이로 살았다. 3, 4년마다 집을 팔고 사면서 옮겨 다니는 게 예사인 도시사람들의 정처 없는 삶을 잠시 돌아보게 되는 대목이다. 몇 백 년 한 곳에 머문 이들이 마을 주변의 산과 들판, 바다와 어떻게 서로 스며들고 하나가 되었을지 떠올려보는 일은 그 자체로도 가슴 벅찼다.

 

 

떠올리기만 해도 웃음이 머금어지는 암소 네 마리
그는 아침 예닐곱 시쯤 잠에서 깨어난다. 습관처럼 담 너머 바다에 눈길을 주고, 식구들과 둘러앉아 아침을 먹는다. 그리고 여덟 시쯤 자신의 일터인 농장으로 출근한다. 신촌리 일대에 흩어져 있는 감귤농장과 그 안에 마련된 소 우리, 두어 곳에 흩어져 있는 보리와 콩을 돌려짓는 밭들, 그리고 지금 돌을 골라내며 개간하고 있는 2천 평쯤 되는 중산간지대 돌밭이 그가 호텔 대신 선택한 일터다. 그리고 그가 참여하고 있는 한울공동체 사무실과 가공공장에는 마을사람들과 함께 점심을 먹거나 공동작업을 하기 위해 수시로 드나든다.
한울공동체(대표 송태문)는 단순하게 유기농산물을 공동 출하 하는 공동조직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원리에 따라 마을공동체를 가꿔가겠다는 생각으로 이 마을 여섯 세대가 2009년에 결성한 조직이다. 이들 대부분은 한 마을에서 같이 자라난 사이고 같은 초·중등학교를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졸업한 동창들이다. 이들은 각자 자기 농사를 짓지만 보리 도정이나 유기농 무를 재배해 무말랭이로 가공하는 일, 말린 고사리 같은 일차 가공식품 제조에 필요한 설비를 갖춰 공동 작업도 진행한다. 한울 공동체가 새 이름을 달고 출발한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지만, 공동작업을 통해 벌어들이는 수입은 공동체를 위해 쓰고 일부는 어려운 이웃을 돕는 일도 하면서 제주도가 더 살만한 섬이 되게 힘 쓸 생각이다.
농부 신만균은 진지향, 천혜향, 한라봉 같은 비교적 좋은 값에 팔리는 고급 수종의 귤을 재배하는 2천5백 평 비닐하우스와 4천 평의 노지 감귤 밭, 그리고 보리와 콩 농사를 짓는 또 다른 4천 평의 밭 등 일만 평 이상의 꽤 규모가 큰 농사를 짓고 있다. 그나마 과수 농사가 대부분이라 이 정도 규모 농사를 가족노동으로 감당할 수 있다고 했다. 연간 7, 8천만 원의 소득을 올리는데 농자재비 같은 비용을 제하면 연간 4천여 만 원 이상의 수입을 얻어 이는 가족들과 별 부족함 없이 생활할 수 있는 정도는 된다고 한다.
연봉이 얼마냐? 이런 식으로 소득에 따라 사람의 수준과 행복의 질까지 서열화 시킬 것 같은 도회지의 논리로는 그가 땅에 발 딛고 살면서 자연과 또 이웃과 조화로운 관계 속에서 느끼는 충일한 감정이 얼마쯤의 환금성이 있는지 가늠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부모님이 농사를 짓기는 했지만 정작 자신은 자랄 때 농사일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었다. 귀농한 그에게 쏠리는 사람들의 싸늘한 시선을 의식하면서 한 사람의 어엿한 농부로 자리잡기까지 그는 짐작대로 더 열심히, 더 묵묵히 땀 흘리며 일종의 통과의례 같은 기간을 지나야 했다.
“처음에는 땅은 정직하니까 무조건 열심히 하자. 그러면 잘 살 수 있겠지.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한 해 두 해 남들에게 물어가면서 농사를 지었죠. 그런데 농사를 잘 지어도 시장상황에 따라 가격이 폭락하면 망하는 거예요. 한쪽에서 누군가 망해야 다른 쪽에서 돈을 버는 일을 보면서 우리 농업이 왜 이럴까 회의가 들었어요.”

 

 

제 감정을 숨기고 감정노동을 해야 하는 호텔일이나 남을 밟고 경쟁에서 이겨야 제 살길을 모색할 수 있는 도회지 삶을 회의하던 그가 농사일을 택한 것은 땀을 흘리면 그에 마땅한 보상이 주어질 것이라는 기대 때문이었다. 귀농을 꿈꾸는 많은 이들의 생각 또한 이와 다르지 않을 것이다. 조금 덜 벌더라도 스스로 자신의 존엄성을 지키며 살겠다는 포부 말이다.
그러나 농사 역시 시장체계에 잇닿아 있고, 시장에 의존하는 한 누군가의 실패를 딛고 제 살길을 모색해야 하는 부조리한 상황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농사를 시작한 지 몇 해 지나지 않아 이내 깨달았다. 늘 돈 되는 쪽을 엿보면서 작목을 선택하는 이런 식이라면 농사가 도박판이나 다를 게 뭔가 하는 회의도 들었다고 한다.
그런 와중에 그는 마을의 농사 선배들을 통해 흙살림을 만났고 이것이 인연이 돼 2000년부터는 한살림에 물품을 내게 되었다. 이들이 말하는 농사는 시장의 돈 논리와는 달랐다. 생명이 살아있는 유기체로 흙과 대지를 바라보고, 여기에 뿌리 내린 작물들과 농사를 짓는 농부들 그리고 이들과 이어져 있는 도시의 소비자들까지 모두가 생명의 끈으로 이어져 있다는 인식도 조금씩 이해하게 되었다.
비로소 자신이 왜 도시 삶을 회의하면서 땅에 뿌리박은 삶을 선택하게 되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자연스럽고 평화로운 조화와 공생의 관계. 그것이 지속 가능하다는 확신이 들었다.

 

 

팔아서 인건비도 건질 수 없는 보리농사를 짓는 까닭
노지감귤이 대부분이던 아버지의 농사를 이어받았지만 그는 수요에 비해 생산이 넘쳐 소득을 기대할 수 없겠다 싶은 노지감귤을 상당 부분 베어내고 진지향이나 천혜향같이 조금 더 비싼 값으로 팔 수 있는 수종으로 농사를 바꿨다고 한다. 지난해 노지감귤이 1kg에 1천3백 원쯤에 출하되었다면 진지향은 이보다 네 배 정도 비싼 값을 받을 수 있었다. 농사 경험도 없는 그가 묘목을 베어낸 일에 대해 부모님과 이웃에서는 손가락질을 하고 반대했지만 신만균 자신이 강조하듯 ‘젊은 패기’와 도전의식으로 밀어부쳤다고 한다.
그의 패기 있는 도전은 단순히 더 높은 소득을 올릴 수 있는 수종으로 바꾼데 그치지 않고, 지역생태순환농업의 고리를 더 완전하게 잇기 위해 목축을 도입하는 일로 또 다시 분주해졌다. 4년 전 마을의 네 집이 각자 천여 만 원씩 출자해서 송아지 13마리를 함께 기르기 시작했다. 모두들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공동 축사를 마련하고 축협이나 농업기술원을 부지런히 드나들며 기술을 익혔다. 3년이 경과한 뒤, 지난 해 가을 무렵에야 겨우 소 키우는 일에 자신이 생겨 각자의 소를 자기 축사로 나눠 갔다고 했다.
이른 아침에 조천읍 신촌리 그의 집을 찾아갔을 때 젊은 농부 신만균이 우리를 제일 먼저 데려간 곳도 그 소들이 있는 우사였다. 진지향 과수 비닐하우스 옆에 있는 그의 소 우리에는 이렇게 한 식구가 된 암소 세 마리와 태어난 지 몇 달 안 된 송아지가 평화롭게 콩깍지와 대궁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암소들 가운데 한 마리는 또 새끼를 배고 있어 금방 소가 한 마리 더 늘게 된다고 했다. 느긋하게 여물을 먹고 난 그의 소들은 상품으로 팔리지 않은 등외품 유기농 귤을 입맛 다시며 후식으로 먹는다.
“경험도 없던 우리가 소를 키우기로 한 것은 소똥을 밭에 퇴비로 돌려주고 보리와 콩 농사를 짓고 나오는 대궁과 줄기 등 농사부산물을 소 사료로 쓰자는 생각 때문이었어요. 그렇게 할 때 지역생태순환농업이 좀 더 완전한 사이클을 이룰 수 있다는 생각을 한 것이죠.”
그의 말대로 소똥 퇴비는 보리밭이나 감자밭으로 돌아가 밭심을 길러 주었다. 그 결과 감자에 많이 생기는 ‘더댕이병’이 현저히 줄었다고 한다.
“이 보리밭을 좀 보세요. 여기서 오백여 평 밭에 보리농사 지어봐야 한 가마에 5만 몇 천 원씩 몇 십만 원 안 나와요. 제주도에 보리밭이 많았는데 급격히 줄어든 건 이런 사정 때문이죠. 다들 밭에다 소득작물이라면서 브로콜리 같은 채소 농사만 지었어요.”
농부들이 인건비도 못 건지는 보리농사를 포기한 것은 어쩌면 거스를 수 없는 대세였을 수도 있다. 그러나 신만균이 참여하고 있는 한울공동체가 지역생태순환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보리밭의 가치는 단순히 몇 십만 원의 돈이 아니라 보리를 털고 남는 보릿대와 도정하고 남는 보리 기울 같은 농사 부산물, 그리고 보리와 돌려 짓는 콩깍지와 콩대가 소사료로 쓰이며 맞물려 돌아가는 것을 염두에 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더 큰 가치로 다가왔다. 30여 년 전만 해도 대개들 그랬듯 집집마다 소나 말을 한두 마리씩 키우면서 퇴비를 자급하고 농사부산물을 사료로 쓰는 순환적인 농업으로, 이제야 되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신촌리의 보리농사는 이렇게 되살아나고 있었다. 힘들여 농사지어봐야 돈이 안 되니 식량은 핸드폰을 팔아 사다 먹으면 된다는 식의 비교우위 논리 때문에 벼랑 끝으로 내몰린 우리 농업이 어떻게 살 길을 뚫을 수 있을지 가늠해볼 수 있는 대목이라 여겨졌다. 또한 그것은 그가 더 이상 도시로 출퇴근 하는 삶을 지속하지 않기로 한 결정처럼 그것은 전혀 다른 가치를 따라 보다 자연스럽고 편안한 삶으로 옮아가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젊은 농부 신만균과 그의 아내 허연숙은 아이들이 굳이 학교를 졸업 한 뒤 도시에 나가 경쟁에서 이기는 삶을 살라고 채근할 생각이 없다고 했다. 물론 아이들이 스스로 원하면 얼마든지 뒷바라지는 하겠지만 말이다. 그들 부부의 편안한 이 말들은 몇 백 년 붙박여 살았다는 고향 마을에서 바라다 보이는 큰 산과 한 없이 뻗어 있는 바다, 그리고 마을과 뒤섞여 있는 들판으로부터 배우고 깨달은 마음으로부터 배어나온 게 아닐까. 제주를 떠나 서울로 돌아올 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살림이야기 제08호 (2010년 봄) 땅땅거리며 살다

글 김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