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하탑 – 유억근 생산자

소금다운 소금을 먹을 수 있게 한 이

 

 

신안군 임자도 마하탑의 유억근 생산자 

“그날 소금이 얼마나 올지는 하늘만이 알아요.”
신안군 임자도 이흑암리 염전에서 그는 무심한 눈길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염전사람들은 증발지를 거치며 염도가 높아진 바닷물이 결정지에 도달해 소금 결정으로 맺히는 것을 ‘소금이 온다’고 했다. 씹어볼 수록 말맛이 나는 표현이다. 마치 그의 염전에서 막 걷어낸 소금 몇 알을 혀끝에 올려놓았을 때 필시 바다에서부터 왔을 비릿한 생명의 기운이 아련하게 맡아지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의 표현대로라면 소금은 과연 어디에서부터 우리에게로 오는 것일까. 그 말을 들으며 우리의 몸조차 빅뱅의 순간에 흩어진 별 부스러기들로 이루어져 있다는 말을 떠올렸다면 지나친 것일까. 그러나 어찌 소금뿐이랴. 눈앞에 보이는 모든 사물, 사람과 생명 있는 모든 것들이 인간들이 이제까지 발견하고 알게 된 110여 개의 원소들이 이렇게 저렇게 조합된 결과물일 테고,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정신이나 마음조차도 그들의 작용과 밀접한 것이 아니겠는가.
임자도 사람 유억근은 우리가 매일 먹고 있는 소금이 물이나 쌀만큼이나 중요하다는 것을 남들이 미처 깨닫기 전에 먼저 생각한 이다. 그와 함께 하는 이들의 수고로운 노동을 통해 세상으로 ‘오는’ 천일염 때문에 우리 가족들은 여느 한살림 조합원들처럼 다른 양념을 하지 않아도 개운하고 깔끔한 국물을 매일 먹고 살게 되었다.

 

 

2007년 11월에 가까스로 법이 개정되기 전까지 우리 갯가에서 생산된 천일염은 광물로 분류돼 식품으로조차 인정을 받지 못하고 천덕꾸러기 취급을 받아왔다. 정부는 2005년까지만 해도 염전을 사양산업으로 치부하고 폐전지원금까지 주면서 염전을 닫도록 종용 했었다. 이 도저한 시대의 흐름을 거스르면서 소금다운 소금의 가치를 먼저 깨닫고 지켜온 이가 한살림에 소금과 젓갈을 내고 있는 마하탑의 유억근 대표다.
그이에게 전화를 걸면 신호음 대신 오래된 레코드판에서 복원했을 법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 애잔하게 들려온다. 그는 임자도에서 국민학교까지 마치고 목포로 유학을 떠나 그곳에서 중고등학교를 다녔다. 인터뷰를 위해 임자도에 가 그를 만나고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김대중 전 대통령 국장이 있었다. 그 이 역시 목포 앞바다의 섬에서 태어나 목포에서 젊은 날을 보냈다. 고통 받는 이들을 끌어안은 채 엉엉 울 줄 알던 그 대통령의 애창곡 역시 <목포의 눈물>이었다고 한다. 우리 근현대사가 민족 전체가 고통을 견뎌온 기록이겠지만 특히 이 지방 사람들이 겪은 세월은 더욱 시리고 고되며 외로운 것이었을 터다. 그 때문인지 남도 사람들의 눈빛은 대개 촉촉하고 깊어 대하는 사람의 마음을 웅숭깊게 들여다보는 느낌을 준다. 또 높낮이 차가 그다지 크지 않으면서도 부드러운 그 지방 말씨에는 유독 말하는 이의 감정이 많이 실려 있어 듣는 이의 마음을 잡아끄는 묘한 친근감이 느껴진다. 그의 말투와 눈빛이 똑 그랬다.

 

 

우리 천일염이 최고라고 이제야 알아주는 이들이 생겼다
서해안고속도로가 뚫려 많이 단축됐지만 서울에서 임자도까지 가는 길은 여전히 멀다. 연이은 태풍이 중국과 일본에 사상 최대의 폭우를 쏟아 붓고 그 여파로 우리 국토의 남녘에도 장대비가 쏟아진 다음 날 그를 만나러 남쪽으로 달려갔다. 서해안고속도로 무안 나들목을 빠져나와 남쪽 지방에서나 볼 수 있는 동백이나 무화과 같은 나무 들 사이로 붉은 황토가 드러나 있는 완만한 둔덕들 사이로 달리다보면 어느 순간엔가 지도라는 섬에 들어서게 된다. 1974년에 육지에 연결된 탓에 섬에 들어섰다는 것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다. 2,30분을 더 달리다보면 부지불식간에 차는 바닷물이 일렁이는 점암선착장에 도달한다. 여기서 또다시 차와 사람이 함께 배를 타고 20분 정도 바다를 건너면 임자도에 닿는다. 양파와 대파 농사를 많이 하고 섬의 끄트머리에 있는 포구 전장포에서는 우리나라 새우젓의 60%가 난다.
한살림 생산자연합회 부회장이기도 한 그는 사단법인한살림 이사회, 생산자연합회 등의 이런저런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또 매월 첫 주 일요일 대통령 경호실 삼청법당에서 여는 법회를 이끌기 위해 거의 매주 이 먼 길을 거슬러 서울에 왔다가 섬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가 서해안고속도로를 달릴 때 차창 밖으로 장엄한 노을이 지기도 할 것이고, 도선장에서 배를 기다릴 때면 때로 물에 젖은 솜처럼 피곤해진 몸으로 막막한 바다를 바라볼지도 모를 일이다.
올 초, 육지 나들이가 너무 과하다 싶던 차에 건강에도 무리가 와 (그 무렵 갑자기 귓속 달팽이관에 이상이 생겨 심한 어지럼증을 느꼈었다) 그는 맡고 있던 한살림 생산자연합회 전남대표 자리를 사양했었다. 그러나 조직에서는 오히려 그에게 전국연합회 부회장 자리를 맡겼다. 천성적으로 남의 요구를 잘 거절하지 못하는 그는 또 맡은 일을 성글게 하는 것은 성에 차지 않아 지금도 여전히 서울이나 대전에서 열리는 회의나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거의 매주 섬에서 뭍으로 나온다.
그는 조상 때부터 살아온 이 섬에서 태어나 국민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살았다. 그가 태어난 집은 섬에 유배 와 있던 조선 문인화의 시조 조희룡이 살던 집이라고 한다. 추사 김정희 등이 들여온 중국의 화풍을 배제하고 조선 문인화의 시원을 열었다는 그의 정신이 오늘날의 그에게도 어떤 식으로든 전달되지 않았을까 .
그의 아버지는 섬 안에서 비교적 넉넉하게 농사를 지었다. 학교 공부에 재주가 있던 둘째 아들을 당시만 해도 배를 타고 네댓 시간은 족히 가야 할 만큼 먼 목포로 유학을 보냈다. 섬에서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이들이 채 20%도 안 되던 때였으니 유학을 떠나 일류학교에 진학한 그에게 집안에서 걸었을 기대가 어땠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가 훗날 고향으로 돌아와 소금과 젓갈 공장을 차리자 그의 아버지는 상심해 돌아가실 때까지 일체 그가 만든 것들을 입에 대지 않았다고 한다.

 

 

초등학생 때 만난 아내를 지금도 한결같이 귀하게 여기고 사랑한다.
목포에서도 공부를 곧잘 한 그는 중학교 때 이웃집에 살던 국민학교 6학년 이정심의 목여중(목포여중) 입학 시험 준비를 도와주게 된다. 이 인연으로 이들은 훗날 부부가 되었다.
“이 사람이 목여중 입학시험에 붙어놓은 상태에서, 장인어른이 가방까지 사주시고는 갑자기 돌아가셨어요. 국민학교 5학년이던 처제, 3학년인 처남, 이웃집의 이 어린 삼남매가 얼마나 안됐던지 마음이 아팠어요. 그래선지 지금도 어린 동생 같고 그래요.”
그는 아내를 물끄러미 바라보며 이렇게 이야기했다.
“남들은 결혼하고 오래 지나면 권태기가 온다고 얘기하는데 나는 그런 말을 잘 이해 못해요. 한 번도 그런 마음이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남편의 이런 말을 아내도 똑같이 되풀이 한다. “사업하면서 남들 요구 쉽게 거절하지 못해 떼이고 그런 게 안쓰러운 적은 있을지 몰라도 남편이 저나 아이들한테 한 것 때문에 서운했던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렇게 한결같은 마음으로 서로를 믿고 의지하며 살뜰하게 사랑하지 않았다면 이들 부부가 임자도에 돌아와 당시만 해도 모두가 손사래를 치며 말리던 소금을 기어이 되살려낸 일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는 여고를 졸업하고 을지로 입구에 사옥이 있던 SK 본사에 취직한 아내와 다시 만나 1982년에 결혼을 하게 되었다. 그의 나이 서른하나, 아내가 스물일곱 살 때 일이다. 결혼을 하고 이내 첫 아이가 들어섰다. 결혼과 아이의 출생, 그리고 1980년의 용암처럼 뜨거웠던 5월의 일들은 흔히들 일류대학으로 일컫는 대학에 다니며 고시를 준비하던 그의 삶에도 적잖은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인생 공부 했죠. 그 무렵 마음 속에 어둠과 방황이 있었어요.”
이렇게 절제된 표현으로 담담히 회고했지만 그가 겪었을 번민을 희미하게나마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하탑이라는 이름이 짐작하게 하듯, 그 무렵 마음의 갈등을 넘어서려고 불교공부를 시작했고 포교사 자격을 얻었다. 큰 딸아이 지원이가 들어선 무렵에 그는 ‘출세’를 향한 그 공부를 깨끗이 단념했다. 그리고 몇 년 선배의 변호사 사무실에서 사무장 일을 하다가 어떤 이유인지 그간 해오던 공부나 전공과는 전혀 무관하게 소금이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1986년 무렵이었다. 그가 말한 우연한 계기가 무엇이었을까. 정제염, 재제염이 식용소금의 전부인 것처럼 여겨지던 시절이었고, 소금이 고혈압 등 각종질병의 원인으로 지목되고 있었지만 그는 섬에서 나고 자라면서 물처럼 공기처럼 늘 먹어온 천일염과 그것으로 담근 새우젓과 그것을 휘휘 풀어 끓인 국물들에 대한 자연스럽고도 편안한 기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다.

 

 

몸을 상하게 하는 소금, 이롭게 하는 소금
재제염은 국산 천일염과는 달리 미네랄 성분이 거의 없는 멕시코나 호주 등에서 수입한 천일염을 물에 끓여 염화나트륨성분이 95% 이상 되게 다시 만든 것이다. 정제염은 기계장치를 통해 바닷물에서 염화나트륨 성분만 99% 이상 되게 뽑아낸 인공소금이다. 그 밖에도 중국 등에서 들여온 값싼 암염을 등을 쓰는 탓에 지금 우리나라 천일염은 공업용을 포함한 국내 전체 소금 수요의 10%, 먹는 소금의 40% 밖에 자급하지 못하고 있다고 한다.
우리나라 갯벌의 염전에서 생산되는 천일염은 염도가 80% 정도고 나머지는 미네랄 성분으로 채워져 있다고 한다. 미네랄의 사전적 의미는 광물질이다. 질소, 수소, 산소 탄소 등 우리 몸에 있는 원소 중 대부분을 차지하는 이 네 가지를 제외한 나머지 성분의 총칭이라고 할 수 있다. 미네랄은 뇌와 세포사이의 정보소통의 매개 역할 등을 하는 필수적인 성분이지만 몸 안에서 생성되지 않으며 음식을 통해 섭취해야 한다. 몸 안에 미네랄이 부족하면 면역체계가 교란돼 건강을 해치게 된다. 그런데 저개발국가에서는 문제가 없는데 미국 등 앞서 산업화 된 나라사람들은 예외 없이 미네랄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고 한다. 예전에는 토양에 미네랄이 풍부했지만, 수세식 화장실이 일반화 돼 똥의 순환이 단절되고, 무분별하게 화학비료와 농약을 살포하면서 작물을 통해 미네랄을 섭취하기가 어려워진데다 패스트푸드와 가공식품을 많이 먹는 식생활 때문에 그렇게 된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놀랍고 고맙게도 1kg에 7,8만 원씩 고가에 팔리는 프랑스의 게랑드 염전이나 이탈리의 천일염보다도 우리나라 신안군에서 나는 천일염은 월등하게 미네랄을 많이 함유하고 있다고 한다. 그나마 이런 것들이 밝혀진 것은 마하탑 소금이 세상에 나온 지 한참 뒤의 일이다.

 

천사들의 집단을 만난 것 같았다
그는 1986년경부터 목포 용당동 시장에 작은 가공공장을 내고 고향 임자도에서 생산된 천일염을 가져다 한살림에 소금을 내기 시작했다. 국산 천일염 자체가 천대받고 있던 상황에 갑자기 소금일에 뛰어든 그를 이해해준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막 첫발을 내딛은 한살림이 천일염의 가치를 인정하고 이해해 주었을 뿐이었다. 현재 한살림사업연합 대표인 이상국을 통해 한살림과 관계를 맺고 되고 윤선주, 하선주, 서형숙 같은 초창기 조합원들을 만났다. 천일염에 대한 자신의 신념을 이해하고 신뢰하면서 격려해주던 그 무렵의 한살림에 대해 그는 ‘천사들의 집단 같았다.’고 회고했다. 얼마나 싸게 사서 이익을 취할 것인가만 따지는 시장의 논리와는 무관하게 사람에 대한 배려, 사람과 자연에 대한 웅숭깊은 생각으로 관계를 맺고 사람을 대하는 그들이 어리둥절할 정도로 선량하게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초창기 실무자들도 그래요. 그 당시 대학졸업하면 또래친구들이 한 달에 100만 원쯤 받을 때 그 사람들은 25만 원 받으면서 겉보기에는 식품 배달하는 일을 했잖아요. 신념이 없으면 하기 어려웠겠죠. 가끔 서울에서 밤 늦게 일을 끝낸 그들과 생맥주를 마시다보면 그 순수하고 열정에 찬 자세가 무척 좋았어요.”
예나 지금이나 그는 자기 삶에서 한살림을 빼놓는 일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의 아내는 그런 그를 두고 “한살림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고 하면서 웃었다.
그러나 초창기 한살림의 조합원은 몇 세대 되지 않았고 소금의 수요도 미미했다. 소금을 내고 그가 얻는 수입은 몇 년 동안 월 5만 원 남짓밖에 되지 않았다. 두 딸이 아직 어릴 때였다. 한살림 실무자나 조합원들이 늘 ‘생활을 어떻게 꾸려가느냐?’ 며 그를 걱정했다. 아내는 ‘25만 원만 갖다주면 걱정이 없겠다.’고도 했다. 5년 쯤 버틴 뒤에는 그도 앞이 보이지 않는 이 일을 지속할 것인지 고민에 빠졌다. 아내에게도 ‘딱 2년만 더 해보고 안 되면 포기하겠다’고 이야기 했다. 1992년 그가 개발한 ‘볶은 소금’으로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 천일염을 300℃ 정도의 열로 볶은 소금은 미네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화학조미료 없이 조리하기에도 좋아 소비자들에게 뜨거운 반응을 얻었다. 당시 천일염은 식품이 아닌 광물질로 분류돼 가공식품 등에 쓰이는데 제약이 많았지만 볶은 소금은 처음으로 식품허가를 받았다.

 

 

정말로 출세한 섬사람이 되었다
1996년부터는 아예 섬에 있는 염전을 매입해 직접 소금을 생산했다. 그러나 섬에 돌아와 사양 산업으로 치부되던 염전을 시작하고 소금 가공공장을 지으려는 그를 대하는 고향사람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가까스로 고향 마을 뒷산에 부지를 마련하고 공장을 지으려고 할 때도 오수가 배출될지 모른다며 주민들이 반대해 포기해야 했다. 이 때문에 지금 볶은 소금 공장이 있는 이흑암리 바닷가 쪽에 다시 부지를 마련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섬사람들이 채취한 쑥과 고사리를 비싼 값으로 사들여 한살림에 내면서 주민들의 소득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외지 상인들은 고사리와 쑥을 채취해놓으면 갑자기 그날 섬에 들어오기 어렵겠다고 연락을 해 값을 후려치는 농간을 부리곤 했는데, 그는 시중가격보다도 훨씬 좋은 가격으로 사들이고 상대적으로 싼 값으로 한살림과 일부 생협에 공급했다. 섬사람들은 차차 그의 진정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의 사무실에는 주민들의 마음이 담긴 감사패가 자리잡고 있다.
“임자도에 들어온 것은 고향이기 때문이라기보다 돈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어요. 섬에 와서 염전과 공장을 세우는 일을 머릿속에 그려보는데 몇 개의 산봉우리 넘어야만 도달할 수 있는 아스라히 먼 곳을 향하는 것처럼 막막했어요. 또 고향이라도 금의환향하지 않고는 환영받기 어려워요. 두 배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되더라고요.”
변변한 수입도 없이 몇 년을 뚝심 있게 버텨낸 일이나, 섬으로 들어가 사업을 시작한 일 모두가 한결같은 마음으로 믿고 함께 한 아내가 없었다면 과연 가능했을까 싶기도 했다. 아내와의 사이에 두 딸을 둔 인연 때문일까. 그는 마하탑의 이익금 가운데 3%를 ‘여사랑운동기금’으로 적립하고 있다. 말 그대로 여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일, 특히 여성의 몸을 귀하게 여기는 일을 염두에 둔 것이다. 단체를 결성한 것도 아니다. 그는 낙태가 여성의 몸에 얼마나 나쁜 영향을 미치는지와 같이 여성의 몸과 건강에 대한 책을 발간해 사람들에게 배포하고 공감을 넓히는 일을 준비하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조금씩 일을 밀고 나가며 스스로 소금다운 소금, 고향의 살아있는 갯벌과 찰진 햇살과 바람이 가져다주는 건강한 소금을 생산하는 일을 실현시켰다.
그의 소금은 우리나라 천일염 가운데서도 독특한 가치가 있다. 임자도의 갯벌 염전들은 똑 같이 청정해역인 신안 앞바다의 바닷물을 끌어들인 저수지를 통해 각자의 증발지로 물을 들인다. 염도 3%의 바닷물은 1증발지와 2증발지를 거치면서 15%까지 염도가 높아진 뒤 소금 결정지로 온다. 저수지에는 짱둥어 게와 석화 같은 온갖 생물들이 바글거리고 그의 염전 증발지에는 함초도 자라고 이끼도 끼어있다. 바닷물을 햇볕과 바람으로 증발시키는 것 말고는 아무런 화학적 처리를 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것이다.
염도가 높아진 바닷물은 도중에 비가 쏟아지면 ‘비설거지’를 해 염전 가운데 있는 함수조인 해주로 피신시켜 염도를 유지한다. 바다에서부터 결정지까지 물이 옮겨 다니는 것은 조수간만의 차와 완만한 고도차를 둔 염전의 구조 때문에 수문을 열고 닫는 것만으로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마하탑의 이흑암리 염전의 수로와 함수조의 바닥과 벽면에는 모두 송판이 깔려있다. 송판은 모두 스테인리스 못으로 고정돼 있어 녹물이 스며들지 않게 했다. 또 여느 갯벌 염전들은 벌흙에 판 웅덩이에 지붕만 씌운 구조라 한 해만 지나도 침전물을 쌓이고 흙이 무너져 웅덩이가 메워지는 것과 비교가 된다. 벽과 바닥이 송판으로 덮인 함수조에서 결정지로 다시 나오는 소금물은 이물질이 섞이지 않도록 호스로 이동시킨다. 이렇게 염전 곳곳에 세심한 배려가 스며있는 때문인지 결정지에서 막 걷어낸 마하탑의 소금들은 눈처럼 눈부시게 희다. 그의 말처럼 몸 안에 들어가 생리작용만 하고 고스란히 몸 밖으로 빠져나오는 깨끗한 소금은 이렇게 만들어지고 있었다. 그것도 뜨거운 여름에만 말이다.
염전에 있는 소금창고에서 며칠 동안 자연 탈수된 소금들은 임자도 안 쪽 대기리에 있는 마하탑 공장으로 옮겨와 윈심분리기로 탈수를 한다. 이렇게 하면 소금 결정 안에 있는 간수까지 완전히 빠져 쓴 맛이 남아 있지 않고 오래 보관해도 물기를 머금게 되거나 하지 않는다. 이것 역시 마하탑의 유억근 대표가 개발한 방식이라고 한다.
소금이 온다는 표현은 옛사람들로부터 전해온 말이었을 것이다.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라 단지 오는 것. 인공의 기계소금들과 달리 우주를 이루고 있는 광물질들을 함유한 채 모습을 드러내는 자연의 소금. 그것은 오랜 동안의 오해와 달리 불결하지도 않으며 몸 안에 이상을 일으키는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미네랄을 함유하고 몸 안의 균형을 바로잡아주며 좋은 영향을 주는 것이 밝혀지면서 서서히 진가를 인정받고 있다. 물론 유억근 생산자 한 사람이 그런 일을 일군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서서히 그 깨달음의 지점에 도달해 갈 때 미리 고난의 길을 마다않고 걸어가 실제로 그런 맑고 단 소금을 만들고 있던 사람. 그는 세상으로 온 소금과 같은 사람이었다.

 

 

살림이야기 제06호 (2009년 가을) 땅땅거리며 살다

글 김성희 사진 장성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