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솔뫼농장 – 김의열·권영매 생산자

아이 여섯, 참 고마운 일이죠

 

 

‘잘 사는 사람’이 참 많은 세상이다. 재산이 많다는 것은 소비수준이 높다는 말일 것이다. 기억을 더듬어보면 1960,70년대에는 남이 쉽게 지닐 수 없는 값비싼 물건을 가진 이를 흔히 ‘잘 산다’고 했다. 텔레비전이나 냉장고, 심지어는 전화를 놓고 사는 집, 드물게는 자가용을 가진 이들을 잘산다고들 했던 것 같다. 아직도 명품 가방이나 비싼 장신구를 몸에 두르고 정신의 허기를 메우려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제 물건을 가지고 잘사는 자랑을 하기는 어려운 시절이 되었다. 우스갯소리로 자식 수가 소득수준에 비례한다며 자식 많은 사람이 ‘부자’라는 말을 하는 이도 있다. 온종일 학원 순례를 하는 아이들 뒷바라지에 어지간히 사는 사람들조차도 등골이 휘는 세태를 감안하면 일리가 있는 말이다 싶기도 하다. 둘러보면 아이를 기르는 이들은 너나없이 제 형편껏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자식 뒷감당들을 하고 있다.
 
괴산에 사는 농부 김의열은 그렇게 따지면 무척 ‘잘 사는 사람’이다. 자식이 셋만 되어도 고개를 갸우뚱하는 세태에 그는 아이 다섯을 키우고 있다. 그것도 모자라 여섯 째 아이가 지금 그의 아내 권영매의 뱃속에서 무럭무럭 자라고 있어 이들 부부는 올 겨울이면 여섯 아이의 부모가 된다. 요즘에는 드믄 일이다. 도회지의 상식으로 따지자면 그는 무척 잘 사는 사람이거나 무모한 이이기 십상일 것이다.
 
“감사한 일이죠. 아이들이 잉태되기 전에 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다가 아, 저 집이면 가서 살만하겠다 싶으니까 세상으로 오는 것이잖아요. 그런 점에서 아이가 자꾸 태어나는 게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에요.”
솔뫼농장 한쪽에 있는 원두막에서, 요즘 매일 저녁마다 하고 있다는 국선도 수련에서 익혔을 법한 반가부좌 튼 자세로 허리를 꼿꼿이 세운 채 그는 이렇게 말했다. 그의 세계관과 인생관을 짐작하게 하는 말이다.
그의 아내 권영매는 한 술 더 떠서 말했다.
 
“이제 아이 낳으면 지자체에서 격려금까지 준다네요. 돈이 문제가 아니라 아이 낳은 것을 반기는 사회적 분위기가 생긴 거죠. 기쁜 마음으로 아이 낳아서 기를 수 있게 돼 너무 좋아요.”
아닌 게 아니라 그들 부부가 일조하기도 했겠지만 솔뫼농장 인근 마을에서는 최근 일곱 명의 아이들이 새로 태어났다고 한다. 어느 지역 농촌마을 면사무소에선가 귀농한 젊은 부부가 아이를 낳아 출생신고를 하러 갔더니 하도 오랫동안 그런 일이 없었던 탓에 공무원들이 절차를 잘 몰라 허둥댔다거나, 면사무 직원들이 줄줄이 아이 낳은 집 구경을 하겠다면서 금줄 친 삽짝을 밀고 들어왔다고 해 씁쓸하게 웃은 기억이 있다. 그에 비하면 이들 부부의 자연스럽고도 씩씩한 출산 이야기가 어쩐지 통쾌했다. 돈이 사람의 멱살을 틀어쥐고 거꾸로 주인 행세를 하고 있는 세상에 대한 반격 같기도 해서 덩달아 신이 난 것이다.
 
왜 이렇게 하면 안 되는가? 도대체 무엇 때문에 겁에 질려 아이 조차 마음껏 낳아 기를 수 없단 말인가. 김의열 부부가 막내딸을 안고 흡족하게 웃는 모습을 보자니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불쑥 이런 질문을 해보고 싶어졌다.

 

 

일찍 눈 떠 일로매진 한 길 걸었다
그는 1984년에 서강대학교 종교학과에 입학해 1988년에 졸업했다. 종교학과를 지원한 이유를 묻자 태연하게 ‘성적에 맞춰 가다보니 그렇게 됐다’고 했지만,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어머니를 따라 어릴 때부터 드나들던 성당의 거룩한 분위기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야 좀 더 정확한 이야기일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그의 내면에는 먹고사는 일만이 아니라 더 높은 정신의 가치를 추구하는 그런 힘이 있었던 것 같다. 전공과 무관하지 않게 그는 대학시절 해방신학, 민중신학을 함께 공부하는 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 모임에서 발행하던 소식지의 제호가《생명공동체》였다. 1980년 대중반, ‘변혁’이나 심하게는 ‘무장투쟁’ 같은 단어가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던 그 무렵 사회분위기를 떠올려볼 때 ‘공동체’는 그렇다 쳐도 ‘생명’은 분명 흔히 쓰이던 말은 아니었다.
 
“그 때는 학교 졸업하면 위장취업해서 노동 현장에 투신하곤 했잖아요? 그런데 저는 그런 건 무섭기도 하고 엄두도 안 났어요. 그 무렵 학교 도서관에서 우연히 분도출판사에서 나온 정호경 신부님의《나눔과 섬김의 공동체》를 빌려 읽었어요. 책을 읽으면서 거대한 이념을 앞세운 조직운동이 아니라 농촌의 작은 단위 공동체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 일이라면 할 만하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생운동 이후 ‘현장이전’을 고민하던 그에게 영향을 준 것은 정호경 신부만이 아니었다. 김지하 시인의 《밥이야기》도 그랬다. 뒤에 가농에서 일 할 때 들은 한살림 생산자연합회 초대 회장이었던 경북 의성의 김영원 선생의 강연도 그의 삶에 적잖은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자연과 사람의 관계가 어떠해야 하는지, 이웃이 어떻게 어울려 공동체를 이루어야 하는지 마음속에 정리된 생각들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학교를 졸업하고 단기사병 복무를 마친 뒤 그는 잠시 청주교구 가톨릭 농민회 간사로 일했다. 이 시절 가톨릭농민회에서 그가 ‘병철이 형님’이라고 부르는 이병철, 한살림청주의 상무로 일하고 있는 오상근 같은 이들을 만나 여러모로 배운 게 많았다고 한다. 이병철은 훗날 귀농운동본부를 만들고 이 운동을 이끈 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일은 그 무렵 아내 권영매를 만난 일이다.
“그 사람도 그 무렵 가톨릭농민회 음성분회에서 간사로 일하고 있었어요. 저는 청주 시내에서 고등학교까지 다닌 탓에 시골살이를 통 몰랐어요. 아내는 음성군 금왕읍에서 나고 자랐는데 시골에 내려와 사는 일에 대해 거부감이 전혀 없더라고요. 심성이 착하고 남을 위할 줄 아는 사람이라 그 덕에 돈도 많이 벌지 못하는 남편인데 지금까지 서로 싫증 안내고 꾸준히 살았네요.”

 

 

아내와 만난 이야기를 할 때만은 무표정하던 그의 얼굴에 환한 미소가 번졌다. 결혼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 부부는 자신들이 꿈꾸던 바에 따라 지금의 솔뫼로 이사를 했다. 1994년의 일이다. 온통 농촌 공동체에 마음이 쏠려 있었을 뿐, 단체 실무자로 오래 일하겠다는 생각은 애초에 없었다고 한다. 솔뫼는 부모님이 이 지역에서 교사생활을 하셨기에 어릴 때부터 익숙했고, 가톨릭농민회 청천분회가 있던 곳이라 솔뫼를 함께 시작한 정천복 등과 ‘삼송분회(솔뫼의 행정구역이 삼송리다)’를 결성 하자는 생각도 있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15,6년째 그는 줄곧 솔뫼에서 살고 있다. 마을에서 바라보이는 대야산을 뭉개고 들어선 석산 개발을 반대 하다 잠깐 구속된 일처럼 크고 작은 시련이 없지 않았지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선택에 대해 회의한 적은 없었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도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싶었다.
1980년대의 학생운동을 한 이들 가운데 약 1만 명 가량이 신분과 학력을 숨기고 노동현장에 위장취업 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지금에 와서야 다양한 평가들을 하겠지만 신분을 숨긴다는 것은 자신의 가족, 학력, 인간관계를 포함한 모든 기득권을 내려놓는 것을 의미한다. 가족들과 연락마저 끊고 숨어 살아야 했던 젊은이들의 그 순정한 이타심은 우리 사회에 어떤 형태로든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현장으로 뛰어든 그들 만 명 이상의 학생운동 출신 운동가 가운데 아직까지 현장에 남아 있는 사람은 지극히 드물다. 1990년 이후 현실사회주의 국가들이 줄줄이 붕괴하고, 선거를 통해 1993년 이른바 ‘문민정부’가 들어서자 스스로 설정했던 ‘변혁’에 대한 전망을 상실한 운동가들이 줄줄이 어깨를 늘어뜨리고 현장에서 떠나오던 광경을 우리는 씁쓸하게 목격해야 했다. 정치가로, 샐러리맨으로, 심지어는 보험 외판원으로…. 그들은 학창시절에는 예상하지 못했고 그래서 준비도 없이 서투르기만 한 ‘생활전선’으로 돌아와 운동 현장과는 판이한,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더욱 혹독한 현장체험을 새로 해야 했을 것이다.
비슷한 연배인 농부 김의열에게 그 시절 이야기를 듣다보니 그가 이미 이십 대의 나이에 ‘생명’의 가치에 에 눈뜨고 농촌공동체를 꿈꾸면서 일관되게 한 길을 걸어왔다는 게 새삼 놀랍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적어도 그는 스스로가 선택한 이념으로부터 좌절한 경험이 없는 셈이다. 때문에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추구하던 일을 포기한 경험도 없었던 것이다.
 
농사는 서툴었지만 솔뫼 농사는 꾸준히
농사 경험이 없던 이들 부부가 솔뫼에 와서 처음 자리 잡은 곳은 지금 솔뫼 농장이 있는 삼송리 개울 건너에 있는 천주교 공소였다. 이후로 지금까지 마을 주변으로만 일곱 번 이사를 다녔다. 지금 살고 있는 청천면 이평리 139번지. 마을과 들판이 내려다보이는 나지막한 둔덕 위에 자리잡은 흙벽돌집은 재작년에 그가 일꾼들과 함께 직접 지은 것이다.
 
농사지으며 살려고 와서 처음 시작한 일은 ‘유정란’ 이었다. 그보다 먼저 유기농 농사에 대한 신념으로 감자나 배추 농사도 시도해봤지만 기술도 경험도 없었던 탓에 처음에는 작물들을 제대로 길러낼 수 없었다. 유정란 역시 뭘 알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선배들과 상의도 없이 비닐하우스에 보온 덮개를 치고 무턱대고 닭을 키우고 유정란을 생산했다. 주로 청주교구 성당을 통해 물건을 냈다. 한살림청주의 오상근 상무가 도움을 주었다. 뒤에는 알음알음으로 인천과 서울의 성당들로 유정란 공급처가 늘어났다. 시간이 지나면서 일도 손에 배고 생활도 조금씩 자리를 잡아갔다. 그 뒤로 지금까지 토마토, 수세미 등으로 작목을 몇 번 바꾸며 오늘에 이르렀다. 올해는 농장 총무로 상근하면서 천 평 남짓의 논농사, 참깨와 늙은 호박, 감자 농사도 조금씩 짓고 있다.

 

 

솔뫼는 이제 한살림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시장체계를 넘어서는 대안적 삶의 양식을 모색하는 이들에게 좋은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그래서 견학을 오는 이들도 끊이지 않는다. 11가구 16명 농장 회원들은 가구별로 자기 농사도 짓지만 대개 어울려 품앗이 할 일이 많고, 함께 운영하는 호박즙, 엿기름, 고추장 같은 가공사업, 그리고 공동소유 논과 밭 농사도 함께 한다. 회장과 총무와 사업부장은 2년 마다 총회에서 선출한다. 그는 올해부터 상근직으로 된 총무와 사업부장 가운데 총무일을 맞게 되었다. 초창기부터 몇 번 이 일을 해왔다. 농장의 대소사는 모두 매월 열리는 회의를 통해 결정하지만 서로 매일 모여서 공동 작업을 하고, 점심밥도 어울림터에서 함께 먹고, 저녁때는 국선도 수련도 어울려 하다 보니 서로의 사정과 생각을 세밀하게 이해하고 있을 법하다. 그렇다면 정기회의는 어쩌면 서로가 잘 알고 있는 생각을 꺼내놓고 확인하는 요식적인 절차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
 
솔뫼 농장 한 쪽에 어울림터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귀틀집은 일종의 도농교류센터 같은 곳이다. 이 집을 짓기 위해 솔뫼 회원들이 먼저 나섰고 한살림서울 북부지부 등 소비자들, 솔뫼를 사랑하는 많은 이들이 십시일반 힘을 보탰다. 계절마다 한살림생명학교가 열리고 거의 매주 이런저런 교류 프로그램으로 소비자들이 이곳을 찾아오는가하면 ‘솔사모’라는 솔뫼를 사랑하는 대학생 동아리의 학생들이 이집에 머물면서 농사일도 함께 하고 마을 아이들 공부도 가르친다.
 
“다들 좋은 면만 보시니까 그렇죠.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인데 왜 어려운 게 없겠어요.”
 
서울의 성미산마을과 괴산 솔뫼를 이상적인 마을공동체로 여기는 것 같다고 하자 그는 농장에 대한 평가가 조금 부풀려진 면도 있다고 했다. 모여 살다보니 서로 마음이 안 맞아 속상해 하는 일들도 더러는 있다고 한다. 어디나 있을 법한 그런 일말고도 솔뫼 농장의 총무인 그가 안고 있는 제일 큰 고민은 농산물 가공사업을 벌이면서 안게 된 농장 빚 4억 원이다. 다들 열심히 일하는데다 매출도 꾸준하고 경영형편도 나쁘지 않은데 고추장 같은 품목은 자금회전이 되려면 1년 이상 걸리고 아직 투자를 마친 지 얼마 안 지난 사업 초기라 손익분기를 넘는데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공급액을 갑자기 늘릴 수 있는 것도 아니라 한살림 회원들이 꾸준히 늘고 공급액 규모가 차차 불어나면 경영여건은 개선되리라 생각하고 있다.
 
“애초에 돈 벌어서 개인들이 치부하자고 시작한 일은 아니에요. 사회 공익을 위해 쓰자. 처음부터 공동체의 원칙이 그랬어요. 이익이 발생하면, 솔뫼 조합원 자녀들의 학자금 등 복지기금으로도 쓰고 국내외의 어려운 곳에 힘을 보태려고 하고 있죠.”
 
그는 농장 경영을 더 알차게 해야겠다는 생각에 뒤늦게 회계 공부를 시작해 자격증도 땄다. 또 솔뫼농장이 조합원들이 출자하고 협동적으로 운영되며 사회적 공공성을 높이기 위해 운영하고 있어 사회적기업 요건을 갖추고 있다 싶어 올 8월 인증을 획득을 목표로 추진하고 있다고 한다. 이 모두가 솔뫼가 대지에 더 깊이 뿌리박게 하려는 노력일 것이다.
스스로는 ‘성격도 깔끔하지 않고 끈기도 부족해서 농사도 진득하게 한 가지만 짓지 못했다’며 자신을 박하게 평가 했지만 그는 솔뫼농장의 씨앗을 심은 사람 가운데 하나였고 할 수만 있다면 남은 여생 동안도 이곳에서 평생 일하고 싶어 한다. 1994는부터 정일우 신부 같은 분도 마을에 들어와 함께 살았고 남궁영미 수녀 같은 분도 함께 와서 아이들의 공부방 ‘꿈터’를 열고 계신다. 그러나 회원들의 종교는 제 각각이다.
 
이런 마을 배경을 이해하지 못하고는 김의열 권영매 부부가 여섯째를 잉태하고도 아무 걱정이 없다고 말하는 속내를 도시사람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이들은 마을과 함께 사람들과 어울려 자라고 있다.

 

 

 

부부가 평화롭게 사는 모습 보여주는 게 자식교육 모든 것
아쉽게도 이들 부부가 낳은 다섯 아이 가운데 막내 호나(4살) 외에는 만날 수가 없었다. 중학교에 다니는 둘째 한돌이(16살)와 송면초등학생 가은이(11살), 공부방에 다니는 한봄이(6살)는 이미 학교나 공부방 ‘꿈터’로 흩어져 동무들과 어울려 있는 까닭에 저녁때나 돼야 집으로 돌아오기 때문이다. 대여섯 살만 돼도 아이들은 친구들과 어울려 풀어놓은 병아리들처럼 평화롭게 자라는 게 솔뫼의 풍경이다. 돈 들여서 뭘 가르치는 일은 구태여 하려고도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고 한다. 부모가 사는 모습, 부모가 어울려 있는 사람들, 기대 사는 자연을 유심히 지켜보는 일만으로도 아이들은 정갈한 땅에서 파랗게 물결치는 오뉴월 보리처럼 그렇게 싱그럽게 자라고 있었다.
 
엄마 치맛자락을 잡고 아장아장 걷는 막내 네 살배기 호나는 머루처럼 까만 눈동자가 귀여웠다. 수줍게 웃으면서도 낯선 이들과도 격의 없이 어울릴 줄 아는 것으로 보아 아이가 깃들어 있는 환경이 지극히 평화롭다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읍내의 괴산고등학교에 다니는 맏아들 기송이는 성적우수자로 뽑혀 기숙사에서 합숙을 하는 탓에 2주에 한 번씩 집에 다녀간다고 했다. ‘시험을 좀 못쳐서 기숙사에 뽑히지 않고 좀 더 오래 가족과 모여 살았으면 했는데 운이 없었는지 거기 뽑혔네유’ 부부는 농담인지 진담인지 분간하기 어렵게 퍽 진지한 표정으로 이렇게 말했다. 전교생이 30명 남짓인 송면중학교에 다니는 둘째 한돌이는 가톨릭 신부가 되고 싶어 한다. 속 깊고 생각이 많은 이 녀석은 어느새 아버지와 ‘제법 대화가 되는’ 사이가 됐다.
 
“애들이 많지만 학교에 한 번도 찾아간 적 없고 공부하라는 말도 해본 적 없어요. 그럴 일도 아니고요. 그래도 다들 잘 자라주고 있어요. 자식 키우는데 아무리 돈을 들인대도 부모가 짜증스러워 하면 좋은 영향 주기가 어렵겠죠.”
 
그는 처음에는 자신도 꽤나 엄격한 아버지였고 아내에게도 벌컥 화를 내기도 하는 서툰 가장이었다고 고백한다. 의식적으로 마음을 닦았고 좀처럼 화를 내거나 짜증스러워 하는 법이 없는 아내의 영향 탓이기도 한지 요사이는 그런 경우가 거의 없게 되었다고 한다.
“아이들에게 영어나 컴퓨터 가르치려고 애들 쓰는데 이제 문명 전환이 일어나고 있다고 생각해요. 자연으로 돌아가서 살아갈 능력이 있는가가 영어나 컴퓨터 실력 같은 것보다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지 않을까요.”
그는 요즘의 우리들이 인간 본성의 요구가 아니라 자본과 시장체계의 요구에 따라 끝없이 더 많이 생산하고 이를 위해 더 많이 벌고 더 많은 시설을 늘리는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신 김치와 맹물뿐인 밥상이라도 생명의 원천이 되는 것이니 감사하게 받아먹으면서 더 소박한 밥상, 더 질박한 삶을 살아야겠다 싶단다. 그렇게라면 먹고사는 일에 과연 고민할 게 뭐가 있겠는가, 반문하기도 했다.
태평스러운 이들 부부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도시의 우리 아이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또 7년 넘게 미국으로 처자식을 공부 보내 놓고 떨어져 사는 친구도 생각났다. 자정 넘은 시간 파리한 얼굴로 학원버스 차창에 머리를 기대고 졸고 있는 보통의 중고등학생들도 말이다. 왜 무엇을 위해 우리는 이렇게 서로를 시달리게 하면서 허공으로 질주하고 있는 것일까.

 

 

그는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새벽 대여섯 시면 잠이 깨고 아침 7시 경이면 농장에 나온다. 사무실에 나와 책을 읽거나 그날 일어날 일들을 준비하면서 차분한 시간을 갖는다. 읽은 책가운데 장일순 선생과 이현주 목사가 함께 풀이한《노자 이야기》는 옥편을 뒤져가며 좀 더 각별히 읽었다. 그를 찾아간 날에는 이렇게 시작한 일과가 저녁시간 괴산읍내에서 열린 두 가지 회의에 참여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노무현대통령 장례식을 치른 뒤 사회현안 전반에 대한 의견을 교류하는’ 귀농자들의 대화모임과 ‘대안적인 지역신문 창간’에 대해 지역의 뜻 있는 단체, 인사들의 간담회가 열렸기 때문이다.
 
이미 충분히 소박하게 살고 있는 농부 김의열이 꿈꾸는 더 질박한 삶. 이웃과 조화롭게 어울려 함께 땀 흘리고, 거친 음식도 조금씩만 먹고 마음과 몸을 닦으며 아이들을 마음껏 낳아 기르는 평화. 적어도 그가 살고 있는 땅을 관통하겠다던 ‘한반도 대운하’나 ‘대야산 석산 개발’의 경우처럼 세상이 그가 뿌리 내린 대지를 뒤흔들지만 않으면 그는 뜻대로 여생을 ‘잘 살 수 있을 것 같다.’

 

 

살림이야기 제05호 (2009년 여름) 땅땅거리며 살다

글 김성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