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신암공동체 – 김재범·천영자 생산자

행복한 사람이 길러야 맛있는 이유

 

 

이 댁 딸기는, 가슴 벅차게 맛있다. 상자를 받아들고 뚜껑을 열 때면 보는 것으로도 감격에 겨워 목구멍이 뜨거워지고 맥박이 빨라진다. 손톱만한 연초록빛 꼭지를 붙이고 다소곳이 누워있는, 통통한 과육의 붉은 빛은 산뜻하고 또렷하여 눈이 부시다. 순식간에 마음은 두 갈래가 된다. 천천히, 아껴먹자…. 아니, 싱싱할 때 한 알이라도 더 먹자! 수돗물에 씻는 일일랑 하지 않아도 무방하다. 그럴 여유도 없거니와 무농약 딸기 알에 묻어 온 부여의 온화한 공기보다 수돗물이 혀에 먼저 닿는 건 아무래도 안타깝다. 한 입 베어 물자마자 슬슬 웃음이 흘러나온다. 어느새 정신을 차리고 나면 딸기 꼭지만 수북이 쌓여 있으니, 아… 누가, 언제 다 먹었을까 하는 어처구니없는 탄식이 절로 날밖에.
그러므로 먹는 사람의 마음을 뒤흔드는 기가 막히게 맛 좋은 이 딸기를 길러내는 이가 누굴까 하는 궁금증은 당연하다. ‘생산자가 행복해지면 생산물도 더 맛있어진다.’고 한 프랑스의 공정무역 운동가 트리스탕 르콩트의 확신이 진실이라면 도대체, 딸기 농부는 얼마나 행복하기에 그의 딸기는 이토록 맛있단 말인가.
딸기밭 주인이자 충남 부여군 초촌면 신암리 소부리 공동체(소부리는 부여의 수도인 사비성의 옛 이름. 곳 소자에 지아비 부 혹은 성인 부자를 쓴다)의 장을 맡고 있는 김재범(55세) 씨는 읍내에서 일을 보고 오는 길이라며 불콰한 얼굴로 등장했다. 스스로 조용한 성품이라는데 점심의 반주 한 잔이 그의 과묵한 입을 여는 데 일조한 듯싶다.

 

가톨릭농민회 선배를 따라 시작한 딸기 농사
그는 자신이 직접 기른 딸기에 대해 어떤 평가를 내릴까.
“맛있습니까? 글쎄요. 나는 우리 집 딸기만 먹으니까 원래 딸기 맛이 그런가보다 합니다. 딸기 농사 시작하고는 다른 집 딸기는 일절 안 먹습니다. 잔칫집 가서 딸기가 나와도 보기만 하고 손은 안댑니다. 어떤 약을 치고 어떻게 기르는지 아니까 못 먹겠습디다.”
얼굴이 붉어진 그가 웃었다.
“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하던 선배가 귀농해서 우리 마을에 터를 잡았는데 그이가 한 게 딸기 농사였어요. 비싸게 팔아준다고 해서 1989년 일곱 여덟 명이 함께 시작했는데 생산비 많이 들지, 힘도 갑절 들지, 되는 일보다 안 되는 일이 더 많지… 딸기는 모종에서 수확까지 15개월이나 걸리고 모종을 내기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닙니다. 누구 하나 그만둔다고 하면 나도 그만둬야지 하고 벼르다 보니 시간이 가고 자리가 잡힌 겁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다들 쟤가 그만두면 나도 따라 그만 둬야지, 그랬대요.”
유기농 하는 농부들은 관행농하는 농부를 어떻게 생각할까. 그들도 전에는 관행농을 했었고, 그때는 당연한 가치였다.

 

 

“관행농 하는 사람은 무조건 나쁘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몰라서 그런 거니까, 나도 몰랐으니까요. 나라에서는 무조건 하라고 하고. 나이 드신 분들은 농약이 뭔지 모르는 경우가 많습니다. 얼마 전에도 한 동네 사는 아주머니가 진딧물 약을 쳤어요. 내가 아주머니 그 약이 뭡니까 그러니까 영양제라고 그래요. 그이가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 정말 영양제인 줄 알고 치는 겁니다. 사람도 영양제를 먹잖아요. 그러니 작물이 잘 자라라고 주는 영양제가 이상할 게 없죠. 더구나 이 영양제는 한 번 주면 6,7개월은 진딧물이 감쪽같이 사라지니 얼마나 좋습니까. 80년대 후반 고추에 탄저병이 돌 때 살충제를 막 뿌렸습니다. 꿩도 죽는 맹독성이에요. 지금 우리 마을에서는 관행농 하는 이들도 제초제는 안칩니다. 마을에 친환경농 하는 집들이 늘어나니 알게 모르게 영향을 받기도 하겠고, 도시에 나간 자식들이 친환경 작물을 찾는 것도 이유인 거 같습니다. 걔들이 아버지 약 안 친 거 없어요, 이러니까 안 좋은 건가보다고 막연히 생각을 하는 거겠죠.”

 

농사는 내 멋대로, 내 맘대로, 세상에 둘도 없는 일

 

 

공동체 사무실 한 쪽 벽에는 마을 지도가 붙어 있고, 곳곳이 색색의 형광펜으로 칠해져 있다. 지도 귀퉁이에는 색깔 따라 저농약, 무농약, 유기농이라고 쓰여 있다.
“저만큼 가는데 15년이 걸렸습니다. 현재 신암리 내 농지 중 40 퍼센트가 환경농을 하고 있습니다.”
5년 후면 모두 친환경농으로 돌아설 거라고 기대한다는 그의 소망의 겉모양새는 기업의 치열한 성장 과정과 닮았건만 뿜어내는 기운은 학교 동아리의 흥에 겨운 놀이와 다르지 않다.
“농사꾼이던 우리 아버지도 큰 자식은 도시에 나가 생활하길 바라셨어요. 헌데 학교 졸업하고 받은 월급이 용돈 수준밖에 안됩디다. 마침 농사를 거들던 동생이 허리 디스크에 걸리는 바람에 옳다구나 하고 사표 내고 내려왔습니다. 사실 월급은 핑계였고 내 꿈이 원래 농부였습니다. 학교 다닐 때도 농업책을 즐겨 봤고요.”
농사가 왜 좋을까.
“뭐든 내 마음대로 할 수 있잖습니까. 이런 직업이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내가 심고 싶은 거 심으면 되고, 내가 힘들면 양을 줄이면 되고.”
하지만 더 잘 살려면 많이 지어야 하지 않는가. 이제 중년을 넘어선 부부의 노후도 걱정해야 하고 자식들 미래를 위해서도 그렇다. 부모의 책임과 의무가 내 자식의 요람에서 무덤까지 무기한 전방위 완벽 보육 체제로 확대되고 있는 이 판국에 한 푼이라도 더 물려주려면 뼈골 빠지게 일해도 모자란다.
“내 수준에 맞게 지으면 되지 욕심내면 안돼요. 우리 식구 먹고 살만큼만 있으면 됩니다. 우리 부부는 아이들에게 학원 공부를 시킨 적도 없고, 앞으로 누구처럼 집을 사주거나 할 생각도 전혀 없습니다. 이제껏 아이들에게 용돈을 직접 준 적이 없어요. 우리 집에선 식탁 위에 생활비를 올려두면 필요한 사람이 필요한 만큼 가져갑니다. 어릴 때 아이가 농사일을 거들면 네가 일한 시간을 돈으로 치면 얼마다, 이런 얘기를 해서 그런지 돈 귀한 것을 압니다. 나나 안사람이나 특별히 뭘 하라 소리를 한 적은 없는 것 같아요. 그래도 올바르고 정직하게 자라주었으니 고맙죠.”
대전에서 대학을 다니는 둘째 아들은 주말이면 내려와 농사일을 거든다. 아니 즐긴다. 식품영양학을 전공하는 막내딸은 그의 입에서 유해 물질 같은 단어가 튀어나오면 “아빠가 그런 것도 알아요?”라며 신기해한다. 성인이 된 자식들과 여전히 ‘통하고 있는’ 아버지는 유기농업을 하면서 가다듬어진 그의 정직한 일상이 알게 모르게 영향을 미치지 않았겠나 미루어 짐작한다.
“농사도 무리수를 두고 욕심을 내다보면 실패할 확률이 높아요. 병에 걸릴 확률도 높고, 생산비도 더 많이 듭니다. 딸기는 저온작물이라서 땅의 온도가 30도가 넘어가면 안 됩니다. 이 온도를 유지하려면 고랭지로 가든가 약을 쓰든가 해야 하는데 그럴 수는 없잖아요. 중간에서 조금 더 짓는다고 목표를 잡습니다. 너무 욕심내지 않는 것, 너무 잘하려고 하지 않는 것, 살아가는 방식과도 같습니다.”

 

농부와 작물도 궁합이 있다
그의 하루 일과는 이렇다. 아침 5시 반쯤 일어나 인터넷으로 뉴스를 읽는다. 농업 정보도 꼼꼼히 챙긴다. 기상 시간은 해 뜨는 시간에 따라 달라진다. 6시 반이면 아침을 먹고 밭으로 나간다. 점심은 12시나 한 시경에 하는데 대개 약속이 잡혀 있다. 오후에는 공동체 사무실 일을 본다. 사람 만나는 일이 반이다. 사람 만나는 일에 공을 들이는 까닭은 남들도 그처럼 이 좋은 방법으로 농사를 지으며 잘 살았으면 하는 바람에서다.

 

 

소부리 공동체 회원은 60여 명쯤 된다. 다른 지역에 비해 연령대가 무척 낮다. ‘사오십대 청년’이 주를 이루고 ‘삼십대 아이들’도 있다. 벼부터 딸기, 수박, 메론, 양송이 등을 재배한다. 모두 친환경농법으로 짓는다. 그는 사람과 작물의 짝짓기에 놀라운 감각을 지녔다. ‘사람과 작물 간에도 궁합이 있는 법’이란다.

“딸기는 성격이 세심해야 합니다. 그래서 그 부인의 성격까지 살핍니다. 벼농사는 나이가 지긋한 분들에게 맞고 수박은 뭣보다 부지런해야 하고요. 양송이는 무척 꼼꼼해야 합니다. 시간관념이 철저해야 하니 게으르면 절대 안돼요. 재배사에서 부르면 24시간 언제든지 달려갈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합니다.”
지자체로부터 지원금을 받아 공동체 안팎의 살림도 착실히 다지는 중이다.
“마을에 일자리가 하나씩 만들어 지는데 그 재미며 보람이 무척 큽니다. 우리 같은 사람이 도회지에 나가 이런 일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예 일할 자리도 없잖습니까?”
일당 1만 원 벌이로 일하는 날보다 노는 날이 더 많던 신암리 아무개는 이제 연소득이 5천만 원이나 되고, 귀농 후 땅이 없어 농사도 짓지 못하고 몇 년을 하릴 없이 보내던 또 다른 아무개는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신용불량자이던 아무개 역시 빚을 모두 갚고 저축을 시작했다. 겨우 절반 정도만이 빠듯하게 밥 먹고 산다는 농촌에서의 실로 경이로운 결실들이다. 끊임없이 귀 기울이고 보듬어준 덕분이다.
“선배들이, 가진 사람들이 많이 양보를 해주었어요. 어려운 이들을 소득이 많이 나는 작물에 우선해서 배치합니다. 물류를 통합해 부담을 줄이기도 했습니다. 이들은 앞에 가는 사람 뒷모습을 보고 갈지 말지를 정합니다. 그러니 선배들의 역할이 각별합니다. 이제 농사도 혼자서는 못합니다. 유통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니까 농사 잘 짓는 건 기본이고, 품목 간의 갈등, 회원 간의 갈등도 잘 풀어야 합니다. 농사꾼의 가장 큰 덕목이 정직인 것은 그 때문이에요.”
그는 어떤 비책을 지녔기에 딸기 농사에 이어 사람 농사에도 탁월한 재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일까.
“기다립니다.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립니다. 싫은 소리를 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사람 하나 적으로 만들거나 버리는 건 순식간입니다. 내 이야기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줍니다. 유기농이 그거잖아요. 기다리는 거. 화학비료는 사흘이면 효과가 나지만 유기농 퇴비는 열흘 넘게 기다려야 하니까요.”
기다리는 것! 그러니까 유기농 하는 농부는 인생도 유기농법으로 살아내고 있는 중이다. 제법 자리가 잡힌

전자 상거래 주문을 다른 이에게 넘긴 까닭도 명쾌하다.
“나보다 살림살이가 덜하니까.”
남편이 이리 나온다면 아내는 야무져질 수밖에 없다.
“안식구가 안 도와주면 여기까지 못 왔죠.”
“고맙다고 하세요?”
“아니…”
“왜요?”
“쑥스러워서…”
반주의 취기가 가셨는가 싶던 얼굴이 다시 붉어진다.
사진 찍는다면 절대 나오지 않을 거라는 김씨의 귀띔에 따라 딸기밭 구경을 하고 가겠다며 부인 천영자(50세) 씨를 꼬여내었다. 순식간에 등장한 천씨는 그 와중에도 딸기 딸 채비를 완벽히 갖추고 등장했다. 김씨의 사람 농사에 대한 천씨의 생각은 어떨까.
“딸기 따야 하는데 얼마 전에도 대전에서 회의가 있다며 다녀왔지 뭐예요. 이렇게 바쁠 때 꼬박 하루를!”
천씨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딸기밭 일꾼 김씨의 딸기 따는 속도가 빨라진다. ‘뽁, 뽁, 뽁…’가지에서 잘 익은 딸기 꼭지를 떼어낼 때면 이렇듯 똑 부러지는 모양새만큼 경쾌한 ㅈ소리가 난다. 생산자가 행복해지면 생산물도 더 맛있어진다. 정말?
4년 전 김씨가 공동체 대표 일을 본격적으로 맡으면서부터 딸기 농사는 부인 천씨의 몫이 되었다. 장성한 자식들을 대신해 품에 안은 딸기를 향한 애정은 무척 깊어 보인다. 딸기를 살피는 천씨의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웃음이 떠나지 않는다. 세상 안팎을 두루 이롭게 하는 내 몫의 일에 온전히 몰두할 수 있는 삶이란 얼마나 행복한가. 그러니 행복한 부부가 기른 딸기 맛이 기가 막힌 건 당연지사다.

 

“기다립니다. 5년이고 10년이고 기다립니다. 싫은 소리를 하지도, 미워하지도 않습니다. 사람 하나 적으로 만들거나 버리는 건 순식간입니다. 내 이야기보다는 상대방의 이야기를 먼저 들어줍니다. 유기농이 그거잖아요. 기다리는 거. 화학비료는 사흘이면 효과가 나지만 유기농 퇴비는 열흘 넘게 기다려야 하니까요.”

 

 

살림이야기 제04호 (2009년 봄) 땅땅거리며 살다

글 한정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