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림현미 – 고종환 생산자

초지일관 지켜낸 쌀겨에서

민족의 혼을 찾는다

 

 

신념, 주관, 우직, 강직, 대쪽이란 말들은 그 속에 ‘고집스러움’이란 그림자를 숨기고 있다. 또한 그것은 ‘일관됨’이라는 또 하나의 그림자를 가질 때에 더욱 빛이 난다. 세림世林, 즉 ‘인간과 자연’이라는 회사명 아래 아름다운 강산과 건강한 국민을 위한 일에 일관된 고집스러움을 보이는 이가 바로 세림현미의 고종환 회장이다.

세림현미는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현미유 생산시설을 운영하고 있다. 80년대에는 쌀겨(미강) 소유권을 갖고 있던 정부가 추곡수매 후 축산업 장려를 위해 쌀겨로 식용유를 짜고, 남은 것을 사료로 쓰면서 도별로 착유 공장을 하나씩 두었었다. 그러나 정부의 추곡수매가 폐지되고, 우루과이라운드 협상 이후 값싼 수입 콩이나 옥수수가 식용유의 원료와 사료로 들어오면서 현미유 공장들은 하나씩 국내 대기업의 하청 업체로 전환되었다고 한다. 원래 처음부터 현미유 공장 운영이 사업의 시작은 아니었지만 쌀겨의 중요성과 가치를 생각하고 있던 고 회장은 이때부터 현미유 공장을 매입하게 되었다. 그러나 중소기업으로서 현미유 공장의 타산을 맞추기란 처음부터 쉽지 않았고, 따로 운영하고 있는 사업체와 병행하며 그 손실을 메워 왔다고 한다. 그렇게까지 국내 유일의 현미유 공장을 지켜온 데는 민족 고유의 정신, 즉 겨레얼을 지키고자 하는 고 회장의 마음이 컸다.

 

현재 우리 국민이 1년간 소비하는 식용유가 80만 톤이고 가정용으로 30만 톤이 쓰이는데, 이중 대두유, 옥수수유, 참기름, 들기름 등 스물다섯 종류의 다양한 기름이 사용되고 있다. 일부 참기름, 들기름을 제외하곤 국산 원재료를 쓰는 것은 현미유밖에 없는 게 현실이다. 고종환 회장은 국민 건강에 ‘신토불이’만큼 중요한 것이 없다고 강조하는데, 그러한 측면에서 현미유는 골라먹는 기름의 한계를 뛰어넘어 더욱 중요한 의의를 갖고 있는 물품이다. 또한 농업 부산물로만 취급받던 쌀겨에서 식용유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은 미곡산업에 새로운 부가가치를 창출해 내는 소중한 자원 발굴이 된다. 하지만 식용유 시장의 점유율이 올리브유 42%, 대두유 30%, 포도씨유 16%, 옥수수유 9%, 나머지가 3% 정도이다 보니 현미유는 그 양에서 아직도 미미하다. 그 미미함의 명맥이 그래도 세림현미를 통해서 이어지고 있다 하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GMO 우려가 없는 현미유의 지속적인 생산이야말로 국민 건강을 뒷받침하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현미유를 이야기할 때, 고회장은 현미유의 경제적 측면에 이어 겨레얼 측면이라는 용어를 써가며 설명을 덧붙인다. 현미유를 지키는 일은 사업적인 한계를 뛰어넘어 국민 건강을 지키고 겨레얼을 잇는 행위라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의 설움 속에 싹튼 겨레얼

고 회장은 일제시대에 충남 연기군 금남면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자랐다. 일본의 감시와 압박 속에 농사를 비롯한 모든 경제 활동의 권리를 박탈당하다 보니 자연스레 저항심이 싹텄고, 그래서인지 민족 고유의 정신에 대한 생각을 늘 가슴 속에 새기고 살아왔다고 한다. 공출에 낼 쌀겨를 다 털지 않고 남겼다가 서너 시경 이른 저녁밥을 먹고는 실제 저녁시간에는 먹지 않은 척 솥단지를 비워두던 게 아직도 기억이 난다고. 당시엔 감시가 너무 심해 밥 때가 되면 순사들이 솥단지 검사를 하러 나와 혹시라도 숨겨둔 곡식의 흔적이 있나 감시를 했기 때문이다. 그런 설움 속에 살다 보니 내 나라 내 민족의 고유한 것에 대한 애착이 유달리 강할 수밖에 없다.

 

고 회장은 철저한 자기관리로도 유명한데 아버지의 독특한 교육이 지금도 자신의 삶에 영향을 끼친다고 한다. 어릴 적 아침에 일어나면 학교에 가기 전 꼭 논 주위를 한바퀴 돌고 오게 하셨는데, 나중에 자연의 변화에 대한 아버지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하면 주변의 변화에 대한 무심함에 꾸지람을 듣기도 했다. 논 주변 이슬이 떨어졌는지를 보고 제대로 한 바퀴를 돌았는지 확인했을 정도였으니 아버지의 교육은 대단한 것이었고, 그러한 밑바탕은 꼼수 없는 강직한 경영인의 본바탕을 마련해주었다. 이러한 교육관은 고 회장의 자식 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지금 ‘세림현미’에는 아들도 직원으로 일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엄한 교육이 너무하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몸소 보여준‘일관성’과 ‘언행일치’에 감히 토를 달수도, 달 일도 없었단다. 특히 사훈 중에 눈에 띄는 것이 ‘놀고는 먹지도 않는다’이다. 아들도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시간이 나면 공장에서 일을 도왔을 정도다. 누구든 시간을 헛되이 보내지 않고 노력한 만큼 대가를 받아야 한다는 게 고 회장의 철칙이다.

 

워낙 근검절약이 몸에 배다 보니 자식들도 새로운 물건을 구입할라치면 6개월을 기다렸다가 그때도 여전히 필요한 물건이면 비로소 구입할 수 있었다. 그러나 유일하게 기다리지 않고 바로 돈을 내주는 예외적인 물건이 하나 있었으니, 바로 책이다. 하지만 책을 살 때도 그 전의 책을 다 읽고 이해했는지 검사를 하고 꼭 독후감을 받았다. 그때도 자식에게만 강요하지 않고 꼭 함께 책을 읽고 외웠기 때문에 자식들이 따를 수밖에 없었다. 고 회장이 자식을 엄하게 가르치는 것은 자신의 사후에 자식들이 제대로 사회에서 자리매김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기 때문이다. 자식에게라도 감추는 것 없이 앞뒤가 동일한 모습을 보이는 삶의 태도는 이젠 애쓰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드러난다.

 

사업엔 철학이 있어야 한다

현미유를 지키는 것은 고 회장에게 어떤 의미일까. “쌀겨의 원재료는 쌀입니다. 쌀은 바로 우리 민족의 먹을거리 중 핵심이죠. 살아 있는 순간 가장 중요한 것이 먹을거리이다 보니 제대로 된 먹을거리를 지키는 일은 그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게다가 그것이 우리 민족 고유의 것이라면 우리 몸에 가장 적합하고 좋다는 것도 의심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공장을 매입할 당시만 해도 주위에서 ‘문 닫는 공장을 왜 사들이냐’는 눈길을 보냈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지금은 국내 유일의 상품이 되어 현미유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국내외에서 자신을 찾는 곳이 많아졌다고 한다. 남들이 대수롭지 않다고 여길 때 자신의 신념과 노력을 기울이다 보니 결국 가치 있는 일이 되고, 가치 있는 일을 일관되게 하다 보니 사람들이 모여 들게 된 것이다. 고 회장도 사업가로서 경제논리를 완전히 무시하고 살 수는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일에 대한 ‘동기와 철학’이 경제논리보다 우선되어야 하며, 사업의 밑바탕에 굵직하게 깔려 있어야 한다고 믿고 있다.

 

불안하고 암울한 시기를 지낸 탓에 고 회장이 제대로 받은 정규교육은 6년이 채 안 된다. 그러나 그가 외부의 유혹과 경제논리에 민감할 수밖에 없는 사업을 하면서 소신과 철학을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은 바로 독서의 힘이다. “왜 내가 이 세상에서 사업을 하고 돈을 벌려고 하나”를 늘 생각하고 그에 대한 올바른 소신을 세우는 데 독서만큼 유용한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직원들 역시 독서와 독후감 제출이 필수다. 게다가 그는 독자의 수준을 뛰어넘어 세 권의 책을 써낸 저자이기도 하다. 지금도 집필하고 있는 책이 있는데 제목을 ‘다 함께 삽시다’로 정해 두었다고 한다.

 

우리 땅과 농촌, 나라를 생각하다

고 회장이 현미유 공장을 지켜가면서 늘 생각하는 것이 바로 ‘땅 힘’이다. 각 도마다 사투리가 다르고 체질과 정서가 다른 것도 땅 힘에 의해 구분이 된다고 생각하는데, 우리 땅에서 나는 기름을 먹어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같이 살며 코드가 맞춰지고 서로 익숙해지면서 수천 년 내려온 민족 정서는 교육뿐 아니라 먹을거리도 함께 가야 한다는 것이 평소의 소신이다. 요즘 우리나라 사람에게 많이 발병하는 고혈압과 당뇨도 단순한 병이 아니라 몸과의 충돌로 봐야 한단다. 몸에서 충돌의 표시를 보내고 있는데 깨닫지 못하고 소홀히 하면 죽음으로 답을 준다는 것이다. 먹을거리는 본인의 선택이니 몸을 힘들게 만드는 것도 본인의 탓. 그래서인지 이 땅에서 묵묵히 농사를 짓는 농민들에 대한 생각이 각별하다.

사업하기 힘든 요즘, 고 회장은 지금의 세태를 어떤 혜안으로 보고 있을까. “지금의 사태를 단순히 외국에서 불어오는 바람의 책임으로만 생각지 않아요. 요즘은 남의 덕으로 좋은 생활을 유지하려는 생각이 국가관을 지배하는데 아주 위험한 생각입니다. 누구나가 스스로 내일을 준비하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끝으로 고 회장은 세상을 살아오면서 맘대로 되지 않는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한다. ‘태어남과 죽음, 직업, 지금 이 순간 다음에 무엇이 올지 모르고 살아가야 하는 것’이다. 바로 다음 순간에 무엇이 올지 모르므로 항상 준비하고 미래를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것이 팔순을 바라보면서도 이십대 못지않는 열정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고 회장의 철학이다. 지금의 ‘세림현미’도 ‘내 노력의 결과’라고는 생각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오만이기 때문에 늘 노력하고 배우는 자세로 사물을 대한다. 이윤을 추구하는 사업가이지만 그에 앞서 민족혼인 현미유를 지켜낸다는 자부심이 있기에 자칫 사라질지도 모를 하나의 물품이 계속 숨을 쉴 수 있다. 이제 그는 전북 정읍에서 새로운 시설을 확충해 현미유의 품질향상에 더욱 매진하려 한다. 그렇게 되면 한 사업가의 철학과 신념을 담은 현미유가 전국 곳곳에 더욱 많이 보급될 수 있을 것이다. 이와 동시에 우리 땅과 이 땅 위 사람들의 혼도 더욱 높이 비상할 수 있을 것이다.

 
 
살림이야기 제03호 (2008년 겨울) 땅땅거리며 살다

글 정영희 사진 류관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