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살림축산영농법인 – 안상희 생산자

한살림이 거꾸로 지으면 모든 것이 거꾸로

 

 

그는 맨 바닥에 무릎을 꿇어 절했다. 구제역이라는 난리를 치른 몸으로 조합원들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행했던 모심의 절은, 미안함과 고마움을 전하는 무언의 의식이었다. 그가 바로 살림의 방식으로 축산농업을 하는 한축회의 영원한 간사, 안상희 생산자였다.

 

닭보다 먼저 일어나는 정성으로

눈비산마을(전 충북농촌개발회)에서 한살림을 시작했다. 공무원직을 그만두고 어른들 모시며 농사를 짓고 있을 즈음, 조희부 선생(전 한살림서울 감사)의 권유로 목장을 돌보는 사람이 됐다. 그러다가 1990년 고 박재일 회장의 제안으로 눈비산마을에서 유정란을 생산하게 되면서 안상희 생산자도 자연스럽게 닭을 돌보게 되었다. 일본 야마기시공동체에서 배운 농법대로 유정란생산을 시작하였다. 쾌적하기로 정평이 난 눈비산마을의 닭장은 설계부터 남달랐다. 양계장 지붕 각도를 닭날개 휜 각도와 같게 설계하여, 바람이 불지 않아도 대류현상이 일어나 통풍이 잘 되게 지었다. 처음 병아리 350마리와 부화장에서 일주일간 함께 살았다. 그런 정성때문인지 거의 모두 다 살아남았다. 정성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생명이 살아있는 유정란을 조합원들에게 전하는 기쁨은 참으로 컸다. 닭을 돌보면서 새벽잠이 없어졌다. 닭보다 먼저 일어나 물을 주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던 날들이 2000년 3월까지 이어졌다. 한결같이! 거꾸로, 닭한테 배운 것도 많았다.

 

 

 

한살림축산의 씨앗을 심다

청주에도 거처가 있어 삶의 터를 옮기려다, 나고 자란 땅에서 고향을 지키며 살고 싶어 다시 괴산에 머무르기로 맘 먹었다. 이번에는 닭이 아닌 소였다. 괴산에 소재하고 있는 두레식품과 짝을 이뤄 축산의 한 바퀴를 담당하고자 했다. 그렇게 한살림 이름으로 시작한 한축회는 13년째 그 길을 걷고 있는 중이다. 유정란처럼 축산에도 한살림을 접목시키기 시작했다. 처음에 11농가가 시작했는데, 지금은 소 45농가, 돼지 5농가로 규모가 자랐다. 초창기 참여농가들이 한살림을 잘 알지 못해 살림의 방식을 정착시키는 데에는 어려움이 많았지만 언제나 한살림정신을 강조하고 다녔다. 엄격한 규제를 귀찮아하던 사람들도 점차로 잘 따라주었다. 무언가를 지켜나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지만, 스스로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 여긴다. 그런 실천들이 모여 한살림이 되는 것이라 믿는다. 공급의 안정화를 위해 자체 생산안정기금까지 마련할 정도로 마음이 잘 모아졌다.

 

고기 등급의 기준이 바뀌어야 한다

안상희 생산자는 정작 고기를 그리 좋아하지 않는단다. 하루 세 끼 밥을 먹지 않으면 큰 일 나는 줄 아는 배가 고기를 별로 원하지 않는 모양이다. 만나는 조합원들에게 고기를 덜 먹으라고 직접 말하기도 하는 그는, 안전한 육고기 공급을 위해 정성을 다한다. 유기농지에 사료로 쓰이는 호밀을 재배하는가 하면, 발효사료 개발에도 힘을 쏟는다. 안전한 사료는 물론이요, 축사의 환경, 무항생제, 방제 등 건강한 축산조건을 위해 동분서주 바쁜 나날을 보낸다. 건강하게 자라는 소는 움직임이 있어 근육이 단단하다. 그래서 건강한 고기는 질긴 것이 지극히 정상이다. ‘고기는 씹어야 맛이 난다’라는 말이 있듯이! 사람들이 선호하는 부드러운 고기는 기름기를 함유한 것이다. 기름기가 고루 퍼져있는 정도를 따져 고기등급을 매기는 지금의 방식은 건강을 위한 기준이 아니다. 흔히 말하는 마블링이 많은 고기란 인위적인 방법으로 기름기가 균일하게 퍼지도록 사육하는 것으로, 건강한 소에서 얻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고급육이란 건강하게 자라 몸에 이로운 고기여야 하지 않겠는가!

 

한살림은 나의 동반자

소유는 욕심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그래서 그는 무소유를 택했다. 한축회에 한 푼도 출자하지 않은 것이다. 내 것이라 주장하여 개인의 욕심이 작용하지 못하도록 아예 싹을 자르니, 한축회 일에 더 열심을 낼 수 있었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도 정성을 다하면 내 것이 아니면서도 내 것이 된다”는 말을 하는 안상희 생산자는 그렇게 자신을 엄정하게 다스렸다. 구제역이라는 엄청난 일을 치르면서 3개월을 꼼짝도 하지 않고 농가를 돌볼 수 있었던 힘도 그런 지극함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한살림 초창기, 생명학교의 본거지인 눈비산마을에서 한살림 실무자, 소비자들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독자로 자란 자신에게 정 깊은 가족 같았다. 그런 만남이 참으로 귀해 자신도 생명의 따뜻한 기운을 전하고 싶었다. 그렇게 한살림은 자신의 삶이 됐고, 삶을 마감할 때까지 함께 해도 괜찮겠다는 확신이 들었다.

 

“한살림이 거꾸로 지으면, 모든 것이 거꾸로 짓는다”고 생각하는 안상희 생산자는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기도를 나간다. 자신의 삶에 대한 감사함으로 시작한 새벽기도는 원칙을 지키며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되어줬다. 눈비산마을의 조희부 선생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는 그는 고향 괴산에서 한살림이 걸어 온 역사를 기록하려고 계획한다. 한살림 조합원들에게는 그저 고마울 뿐이라며, 소비자조합원들이 생산지를 살리는 원동력이라고 힘주어 말하며 더 많은 관심을 당부했다.

 

 

한살림서울 소식지, 한살림사람들 2012년 3월에 실린 글입니다.

글 권옥자 한살림서울 홍보위원장

 

* 한살림서울 소식지 공식 블로그  http://hansalimin.tistor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