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칠성유기농공동체 – 윤희창·권오화 생산자

콩 한 줌에, 온기 한 숟가락

 

윤희창·권오화 괴산 칠성유기농공동체 생산자

 

 

11월 11일, 또 한차례 늦가을 비가 지나갔다. 윤희창, 권오화 생산자 부부는 며칠째 검은콩 수확에 한창이다. 남편이 앞서 걸어가며 콩을 베면, 아내가 그 뒤를 따라 콩대들을 싹싹 그러모아 가지런히 쌓는다. 호흡이 척척 맞는다. 스 물한 살, 스물세 살 나이에 결혼해 아들 셋을 낳아 기르면서 농사가 곧 삶이 돼버린 부부의 일상은 언제나 밭에 머물렀다. 이렇다 할 요령 없이 종일 허리 숙여 씨를 심고, 풀을 뽑고, 새를 쫓다가 알곡을 거두는 친환경 잡곡 농사는 때론 슬픔이고 때론 기쁨이었다. 부부는 어린 시절 햇찹쌀과 수수로 만든 수수부꾸미와 쌀 밑에 검은콩을 깔고 짓던 밥 한 공기의 따뜻한 기억이 생생하다. 권오화 생산자는 지난겨울에도 수확한 콩으로 메주를 띄우고 손수 된장을 담갔다. 가족 모이는 새해 아침에는 손수 끓인 두부를 아들, 손주에게 먹이는 게 낙이다. 작년 이맘때 수확한 콩을 담아 수북했던 자루는 저만치 바닥을 드러냈다. 올해 도, 알뜰살뜰 야무지게 농사짓고 살림했다. 한겨울 휴식을 기다린다

 

 

우리 밥상의 귀한 잡곡

 

알수록 그 속이 더 궁금하다

윤희창 생산자는 20년 전 마을 사람들과 농민운동을 하며 한살림을 처음 알았다. 그가 몸담은 괴산 칠성유기농공동체는 한살림 잡곡의 주산지 중 하나 다. 공동체 회원들이 20여 년 전 대부분 젊은 나이에 한살림을 시작해 힘들어도 사람들에게 두루두루 가치있는 친환경 잡곡 농사를 지어보자 의기투합했던 것이 지금에 이르렀다. 윤희창 생산자 역시 그 시절부터 1만 평 가까운 논과 밭에서 벼와 수수, 검은깨, 기장, 차조, 콩 등 수많은 잡곡 씨앗들을 땅에 뿌리고 거두어왔다. 20년 넘게 해온 일이지만 매년 가늠할 수 없는 날씨에 흥망을 반복하는 것이 지칠 법도 한데, 여태껏 그에게 잡곡 농사는 삶의 귀한 보람이자 즐거움이었다. “가만 볼수록 이 잡곡이란 게 참 희한혀. 생긴 것도 다 다르지만, 성격도 제각각인 거여. 콩은 해가 짧아질수록 추 위가 닥쳐오는 것을 지가 감지라도 하는 것 마냥 키를 다 못 키워도 꼬투리부터 달고 알이 여물거든.

 

 

근데 수수는 여하간 일조량이나 이런 게 다 맞아도 어느 정도 시기가 지나야 돼. 이르 면 10월 초부터도 서리가 오는데, 그 전까지는 다 여물어야 되는 거여. 그니께 콩보단 이른 6월 중순엔 파종을 해야지. 기장은 또 어떠냐, 7월 초중순쯤 파종을 하는데, 지가 커서 꽃 피고 열 매 맺으려면 시간이 별루 없잖아? 그럼 아주 안 커 버리고, 꽃부터 피기 시작허는 거여. 기장이 그런 눔이여.” 한 해 한 해 지어온 잡곡 농사 일지를 펼쳐 보기라도 하듯 하나하나 술술 풀어가는 이야기들이 여간 재밌는 것이 아니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는 말도, 저마다 가려운 부분들을 잘 긁어주는 지혜로운 농부가 있어 가능하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가령, 깨처럼 작은 낟알들은 처음 씨앗을 뿌릴 때 흙을 살짝만 덮어주어야 씨가 잘 붙으니 주의해야 하고, 팥은 서리가 오기 전 부지런히 수확해야 삶을 때 익기도 잘 익고 팥 고유의 맛이 잘 산다. 어디, 이뿐인가. 수확 후엔 잘 말렸다가 도리깨질과 키질로 알갱이를 일일이 수작업으로 분리하고 선별해야 한다. 콩 같은 경우, 다른 병해충도 걱정거리이긴 하지만, 알이 여물어 갈 즈음부터 새 쫓는 일이 곤욕이다. “여기 쫓으면 저기 날아들고, 저기 쫓으면 여기 날아들고, 아주 그냥 고것들 때문에 얼마나 애가 타는지…” 갈수록 잡곡 농사가 힘들다는 권오화 생산자가 점심 식사를 준비하며 말을 거든다. 벼는 우렁이라도 풀어 기댈 데라도 있지만 잡곡은 그것마저 없어 오롯이 사람 손으로 김매기를 해줘야 한다고.
생산자와 소비자가 한마음으로 키워온 한살림 잡곡
한살림에서는 괴산과 당진, 홍천, 청주, 원주, 단양, 제주 등 전국에서 깨, 팥, 녹두, 기장, 조, 수수 등을 포함해 30여 종이 넘는 잡곡을 생산하고 있다. 이렇게 생산한 잡곡은 뫼내뜰영농 조합과 괴산잡곡에서 생산자회원들과 계약 재배 형태로 수매하여 선별, 도정, 소포장을 거쳐 소비자조합원들에게 공급된다. 1992년부터 괴산 지역 생산자들의 잡곡을 수매해 온 괴산잡곡은 일 년 내내 저온창고에 잡곡을 보관하여 병해충을 방지한다. 훈증이나 약품처리를 이용한 일반적인 보관 방법에 비해 시간도 품도 많이 드는 일이다. 이뿐 아니라 수매 때마다 우수한 종자들을 선별해 생산자들에게 나누어 꾸준히 잡곡의 품위를 높여 왔다. 경종호 괴산잡곡 대표는 자신을 믿고 계약 재배 방식으로 친환경 잡곡 농사를 지어온 생산자들과의 두터운 신뢰가 괴산잡곡의 가장 큰 힘이라고 말한다.

 

 

“예전에도 특수작물 농사를 주로 지으려 했지, 차조나 수수 이런 것들은 생산을 많이 안 하려 했어요. 제가 조 씨앗을 구해 처음 계약재배를 권유했을 때 기꺼이 손잡아 준 분들이 여전히 참 고맙죠.”

안타까운 소식이지만, 올해 괴산 지역을 포함한 대부분 지역들의 콩 작황이 좋지 않다고 한다. 9월 중순부터 10월까지는 오랫동안 비가 내리지 않고, 건조한 날씨가 계속돼 농부 속을 태우더니, 콩이 한창 여물어야 할 11월에는 때아닌 가을 장마가 찾아온 탓이다. 그나마 잘 여문 귀한 낟알들을 끌어 모으느라 하루 종일 밭에서 구슬땀을 흘리는 윤희창 생산자 역시 새어나오는 한숨을 막을 길이 없다. “이 힘든 잡곡농사를 누가 짓겄어. 앞으로 참 친환경 잡곡이 계속 이어질 수 있을 지 의문이여. 나는….”

 

최근 강원도 양양군 오산리에서 7000년 전 농경을 시작한 증거로 보이는 팥알들의 흔적이 발견됐다고 한다. 영양과 맛이 좋아서 해외에서 들인 잡곡을 찾아 먹는 시대를 살고 있지만, 잡곡은 그 옛날부터 우리네 허름한 부엌간 어디에라도 들어박혀 제자리를 꿋꿋이 지키며 귀한 식량이 되어 왔다. 오늘, 우리 밥상에 수천 킬로미터를 건너온 이름 모를 잡곡 대신 이 땅에서 수천 년 동안 우리 손으로 거둬 몸에도 가장 잘 맞고 안심하고 먹을 수 있는 신토불이 잡곡을 올려봄은 어떨까.

 

경종호 괴산잡곡 대표

 

 

한살림연합 소식지 2015년 12월 (540호)에 실린 글입니다.

글·사진 문하나 편집부

 

 

<이 겨울, 우리 몸을 따뜻하게 해주는 우리 잡곡>

 

<생산지의 밥상>